[낭독 여행기] 스페인: 산티아고 "백면서생보단 그리스인 조르바" - 오디오북 ASMR | 스페인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여행 | 인문학 강의 | 유럽인문산책 윤재웅
《유럽인문산책》 중에서 (윤재웅, 은행나무) 백면서생보단 그리스인 조르바 독일에서 40년을 살았다는데 그는 여전히 모국어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순례길 마지막 구간 출발지인 페드로소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일흔한 살의 남자 30년 전에 암수술 6년 전엔 디스크 수술 누워 있으면 죽을 것 같아 퇴원 3개월 후 산티아고로 훌쩍 떠났다는데 이번이 두 번째 완보 도전이랍니다 구릿빛 얼굴에 흰 털 구레나룻이 산신령 사촌 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 단아한 체구에 차돌 같은 발걸음으로 험한 해안 절벽 길을 걸어온 이 남자 고래 힘줄 같은 찰지고 질긴 눈빛 자신이 다듬는 나무 지팡이보다 더 단단한 그의 손 ‘아유 코레아노?’ ‘예스 아이 앰 ’ ‘반갑습니다 ’ ‘한국 사람이세요?’ ‘네 독일 함부르크에 살아요 ’ 뒤에서 걸어오던 그가 우리를 지나가면서 던진 말이 결국 같은 숙소까지 이끌게 되는군요 콤포스텔라가 하루 남짓 남았으니 이만큼 오면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그와 동행하는 이탈리아 남자는 손 에 깁스를 하고 있습니다 숙소 2층 침대에서 잘못 내려오는 바람에 인대가 늘어났다는군요 일행이 한 사람 더 있었는데 순례 중 장인이 타계해 급히 되돌아갔다고 하네요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나라, 폴란드 사람이랍니다 순례길은 이렇게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일흔한 살의 이 남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닮았습니다 저 같은 백면서생과는 많이 다르지요 책 속의 삶보다 활기 넘치는 실제 경험을 더 사랑하는 사람 화려한 언변을 앞세우기보다는 묵묵히 행동하는 사람 몸 안에는 쓸모없는 지식보다 인생의 신바람이 꽉 들어 차 있지요 인간의 자유, 영원한 자유, 신명 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그대로를 구현한 인물이 바로 조르바이지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읽고 있는 책 《붓다와 목자의 대화》 속 붓다의 목소리와 닮았습니다 2차 대전 때 수집된 유대인 문서보관소에서 일했다는데 처음엔 독일로 파견된 광부 출신인 줄 알았습니다 강인한 인상이었거든요 깊고 컴컴한 갱도 안에서 눈빛 반짝이며 불꽃의 씨를 찾던 우리의 아버지, 삼촌, 형님들… 커다란 덩치에 기타를 메고 걷는 삭발의 여성 안나 생각이 떠오릅니다 에스테야의 알베르게 마당에서 기타 치며 자작곡을 들려주던 스위스 사람 맑고 깊은 그러나 어딘지 서글픈 목소리 모두 박수치고 환호는 해주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그녀의 비밀 누군가 제 귀에 속삭입니다 안나가 암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콧날이 시큰하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제 스물여섯 살짜리가…, 저렇게 멋진 가수가… 안나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요 거리보다 시간이 더 문제겠지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남자의 시간 스물여섯 살에서부터 일흔한 살까지 부디 그 시간까지 안나가 노래할 수 있기를…, 걸을 수 있기를… 뜻 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는 방식으로 경의와 연민을 함께 배운 날입니다 사립 알베르게의 레스토랑 식탁에 네 사람이 둘러 앉아 저녁을 먹습니다 아내와 이탈리아 남자는 스파게티를, 조르바와 나는 티본스테이크를 주문합니다 오랜만에 조국 사람 만나 반갑고 체력 보충도 하자는 조르바의 제안에 저도 동의합니다 눈사람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긴 주인이 즉석에서 숯불로 구워줍니다 스테이크 한쪽이 그의 커다란 얼굴만 한데 값은 싼 편입니다 우리 일행은 맥주 두 병과 포도주 세 병을 비웁니다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여기는 여름에도 선선하다고 조르바가 말합니다 잘 자라는 인사말입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저마다 길을 또 떠납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연락처도 묻지 않습니다 우연히 만나 우연히 함께 한 시간만큼만 서로를 보여주고 나누어가집니다 오래 걷다보면 그게 지혜고 예의임을 알게 됩니다 같은 길 걸으면 별별 사람 다 만납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 상대방이 나처럼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지적하는 사람, 참지 못하는 사람… 그러다가 다투고 맘 상해 제 각각 길 떠나는 사람들 같은 나라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이일수록 다투고 헤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나그네들끼리의 관계는 기약 없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더 자유롭고 그립습니다 병마와 싸워 이긴 일흔한 살의 남자, 병마와 싸우고 있는 스물여섯 살의 여자, 제 맘에 오래 남아 함께할 길 위의 영혼들 우리는 모두 그저 걸을 뿐입니다 --------------------------------------------------------------------------------------------- 작가: 윤재웅 ( shouuu@hanmail net ) 낭독: 김윤정 ( yjlovetykim@naver com ) 관리: 클래시앙 ( classien@daum net ) --------------------------------------------------------------------------------------------- 《유럽인문산책》 구매처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 Copyright Notice --------------------------------- 원문: 윤재웅 Copyright All rights reserved 낭독: 김윤정 Copyright All rights reserved photo by Guilhem Vellut (flickr com | CC BY 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