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독립만세 외칠 것"…여성 독립운동가들
“죽어서도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이다” 교과서엔 없는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99년 전 오늘,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죠 3·1운동 당시 여성들은 일본이 가한 비인도적인 폭력의 큰 희생자였습니다 체포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민족차별과 성차별로 이중의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으면, 여학생과 젊은 부녀자들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본 남자들 앞에 드러내 수치를 주려고 하였다” -책 「한국의 독립운동」, 멕켄지 2019년 삼일절 100주년에 맞춰 기획 발간된 국가기록원의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에는 모진 고문과 폭력을 참아내며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여성들이 아니라 학생, 간호사, 농민, 행상, 기자, 점원, 기생, 교원 등 각계각층의 평범한 우리들의 누이, 어머니였습니다 13세의 한이순부터 57세의 곽진근까지 나이도 다양했죠 하지만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민족 독립을 향한 정신은 모두 푸르고 강했습니다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삼엄한 경계에도 몰래 기숙사 커튼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만세를 불렀으며, 이화여학교는 전교생 만세운동을 계획해 조선총독부가 휴교시키기도 했죠 경남 통영의 애국기생 이소선과 정막래는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팔아 기생단을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3·1 운동 당시 일본 치안 책임자 치바는 “당시 조선의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가 아닌 독립투사였다”고 기록했죠 한편 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이었던 노영렬은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잡혀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꼬챙이로 가슴을 찔리고 살갗이 떨어지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함께 감옥에 간 여학생은 강간을 당하기도 했죠 일본인 헌병은 ‘이래도 계속 만세를 부를 것이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고진 고문 속에서도 노영렬은 끝까지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박진홍, 임명애는 감옥에서 출산을 겪기도 했습니다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도 수감자들은 서로 기저귀를 빨아주고 음식을 나눠주며 수감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아픈 기록은 매우 적습니다 참혹한 고문을 받고 몇 달씩 갇혀 있다가도 재판도 없이 방면된 경우가 많고, 조선인 여성으로서 모욕당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침묵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죠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수많은 폭행과 열악한 수감생활을 견뎠음에도 관련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포상도 극히 제한적으로만 되는 상황”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 독립을 위한 그녀들의 기꺼운 희생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독립투사들의 희생 정신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행정자치부 2016 2 29 보도자료) (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나한엘 장미화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