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0210828 '선택의 기로에서' (누가복음 23장 8~12절) 김미애 전도사

[새벽] 20210828 '선택의 기로에서' (누가복음 23장 8~12절) 김미애 전도사

성락성결교회는 한국교회저작권협회를 통해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와 CCLI로부터 교회저작권라이선스와 스트리밍라이선스를 취득하였습니다. 성락성결교회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와 CCLI 교회 저작권 라이선스 및 스트리밍 라이선스 규정에 따라 비영리 예배 목적으로 이용합니다. 본 영상에 광고가 재생될 경우, 본 교회가 아닌 노래의 저작권자가 결정한 것으로 수익은 교회가 아닌 노래의 저작권자에게 분배됩니다. 본교회의 라이선스 취득 사실을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와 CCLI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명 : 성락성결교회 KCCA Membership #0010413-0017 CCLI License #509426 CCLI Streaming License #113912 [설교원고 전문]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고소 사건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 내부의 민족적 문제임을 인식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던 중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 출신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얻게 되자 마침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인 헤롯에게 재판권을 떠넘겼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총독이 재판권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분봉 왕이 그 지역에 관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것을 이용하여 예수님에 관한 문제를 헤롯에게 일임함으로써 헤롯의 마음도 사고, 자신은 그 곤경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을 넘겨받은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 했는데 이유는 단지 “무엇이든지 이적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주변의 보고와, 소문으로 들었던 일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처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 마법 같은 일을 구경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설렜던 것이죠. 헤롯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진리가 무엇인지 대한 관심보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이적을 통해 자기 욕망을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보고 싶어 한만큼이나 아마도 묻고 싶고 알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계속된 질문으로 자신의 궁금증도 풀어보고, 소문과 같은 기적을 행하기를 유도했겠지만 헤롯은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답변도 기적행하심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이자 조카인 헤로디아와 불법적인 재혼을 하고 이러한 자신의 죄를 맹렬하게 지적한 당대 최고의 선지자인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인물에게 하나님의 신적능력을 보여줄 가치는 없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굳어져 버리면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일 가능성도 없을 뿐 아니라 헤롯의 뻔한 의도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심으로 사53:7절에 기록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당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소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무죄판결 때도 격렬하게 항의했었고, 지금도 예수님께 대해 호의적인 헤롯의 심문과정을 참을 수 없자 예수님을 헐뜯고 온갖 허위사실들을 총동원하여 고발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죄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힘써 고발하는 이들이 모습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경건하고 거룩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인가요? 악의와 시기에 가득 찬 얼굴로 힘을 다해 고발하는 모습은 마치 사단의 참소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참소는 사단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당대의 의인 욥을 쓰러뜨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참소한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욥1:9-11) 또한 믿는 성도들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참소하는 자가 바로 사단이라고 계12:1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무고히 해코지 하는 사람은 사단을 본받는 것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고하게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참소는 비록 말로 그치는 것이라고 하여도 참소 당하는 대상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게 하는 아주 무서운 죄악입니다. 학폭 사건을 보세요. 아이들이 무고한 비방과 괴롭힘을 당하다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잖아요. 누구든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관계의 문제를 잘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하고 화목하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참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데 사람들하고의 관계가 나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이웃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억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5:23-24절 말씀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절)고 하셨습니다. 이웃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예배와 헌신과 충성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헤롯은 자기의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는 예수님의 태도에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굴욕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나 고발하는 자들의 신분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는 점이 헤롯에게 어쩌면 큰 압력으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최고의 종교지도자들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율법학자 서기관들의 요구를 헤롯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막강한 세력의 압력 때문에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롯은 자기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멸시하고 희롱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11절) 여기서 ‘빛난 옷 ‘으로 번역된 •에스데타 람프란’ 은 당시 유대의 왕이나 로마의 귀족들이 특별한 행사를 축하할 때 입었던 망토같은 은실로 짠 옷이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주장에 따라 ‘왕’이 입었던 ‘빛나는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에 나오는 왕자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단지 왕자가 거지 옷을 입었다고 무시하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희롱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치를 감내하며 한걸음씩 그렇게 어린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이은 심문, 대중 앞에 노출된 재판, 멸시와 희롱을 당하시며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 안에서 진행되는 모든 시간 속에 계셨습니다. 빌라도가 헤롯에게로 넘긴 것도 그곳에서 수치와 모멸을 당하신 것도 주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단번에 그들을 멸할 권세가 없으셔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이었기에 묵묵히 참아 내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지요.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진실을 명백하게 밝히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다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필요이상으로 분노하게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근거 없이 비방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차라리 침묵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아요. 침묵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변명하고 싶고 진실을 알리고 싶어도 참다보면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밝혀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헤롯은 자신이 만나기를 고대하고 바랐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조롱하며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로 도로 이송시키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3장에서 빌라도와 헤롯과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 배우자를 결정할 때, 누군가를 사랑할 것인지, 용서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오늘 하루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 것인지 중요한 것부터 사소한 문제까지 우리는 결정하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최고의 정치적, 종교적 권세를 가지고 무죄하신 예수님을 놓아 줄 수도 있었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이권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남기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로 내어주는 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빌라도와 헤롯과 종교지도자들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죄악과 비 진리의 길을 따름으로써 이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비루한 인생으로 낙인찍힌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의 진리를 향한 올바른 선택을 할 책임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것인지 용서할 것인지의 선택, 말씀을 따를지 말지의 선택, 선을 행할 것인지 악을 행할 것인지, 등등 선택의 기로에서 선악을 잘 분별하며 순간순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저와 성도님들에게 허락하여 주셔서 하나님께 인정 받고, 후대에 길이길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복된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