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 왕소군, 인과응보, 서시 초선(혹은 우미인)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녀에 속하는 왕소군은 왜 추녀로 그려진 것인가? 그로 인해 변화된 그녀의 운명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

미녀 왕소군, 인과응보, 서시 초선(혹은 우미인)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녀에 속하는 왕소군은 왜 추녀로 그려진 것인가? 그로 인해 변화된 그녀의 운명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

미녀 왕소군 중국의 4대 미녀라고 하면 서시와 왕소군, 초선, 그리고 양귀비를 뽑는다 초선은 허구의 인물로 초선 대신 항우가 사랑했던 우미인을 뽑기도 한다 왕소군은 기원전 33년 전한의 원제때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갔던 원제의 궁녀였다 왕소군의 원래 이름은 장으로 왕장이라 불렸다 이후 황실에서 소군이란 칭호를 주어 왕소군이라 불리며 후에 사마소의 소(昭)자와 같은 한자를 피하기 위해 왕명군 혹은 명비라고도 불린다 당시 황제인 원제는 잠자리를 함께할 궁녀를 정할 때 화공이 그린 그림을 보고 궁녀를 정하였다 궁녀가 너무 많다보니 궁녀들은 자신이 황제의 낙점을 받기 위해 화공에게 뇌물을 받쳤으나 원래 가난하고 스스로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던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화공인 모연수는 왕소군의 모습을 추하게 그리고 눈밑에 검은 점마저 그려 넣어 불길한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왕소군은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황제의 눈에 띄지 못했다 한편 한나라에 저항하던 호한야선우의 형인 서흉노의 질지선우가 기원전 36년에 한나라에 의해 살해된다 이후 명실상부한 흉노의 대선우가 된 호한야선우는 기원전 33년 정월 한나라 조정에 입조하여 한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청하였다 그러나 적절한 공주가 없어 궁녀중에 한 사람을 뽑아 호한야선우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는데 그때 뽑힌 궁녀가 왕소군이었다 원제는 화첩을 보고 호한야 선우에게 주어도 아깝지 않은 궁녀를 뽑아서 왕소군으로 정해졌는데 막상 왕소군의 아름다운 실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결국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를 따라 흉노로 갔고 뇌물을 주지 않아 왕소군의 용모를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는 황제에게 처형당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왕소군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왕소군이 흉노로 가는 길에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는 설이며, 또 하나는 왕소군이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서모들을 아내로 들이는 흉노의 수계혼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 선우의 아들인 복주류약제 선우와의 합방을 거부하고 자결하였다는 설 등이다 그러나 실제로 왕소군은 흉노땅에 오래도록 살면서 천짜는 기술과 농사기술 등을 흉노에게 전파하고 흉노들의 생활개선에 크게 기여하며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72세에 죽는다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와의 사이에서 이도지아사라는 아들을 낳고 복주류약제 선우와의 사이에서 두명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 이후 왕망이 흉노족을 도발하기 전까지 50년이 넘도록 한족과 흉노족은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왕소군은 낙안의 미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낙안(落雁)이란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갈 때 고향 생각에 비파를 켜자 기러기가 그 소리에 돌아보고 왕소군의 미모에 놀라 날개짓을 멈추어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한편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라는 유명한 글귀도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가 지은 ‘소군원’이라는 왕소군을 노래하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왕소군은 황량한 흉노땅에 시집간 비운의 여성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족과 흉노 사이에 우호를 증진하여 평화로운 시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한편 뇌물의 유무에 따라 진실을 왜곡했던 모연수라는 화공의 비참한 최후는 진실을 왜곡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왕소군#인과응보#호한야선우#교훈을주는이야기#낙안#효원제#춘래불사춘#중국4대미인#모연수#화가#흉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