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전선 지연전 9편, 조치원전투! 미 24사단 서부전선 지연전 결과 및 평가, 국군 6기병중대 북한군 2개 중대 격퇴
미 24사단은 7월 13일 기준으로 잔류 병력이 11,440명이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병력이 15,965명이었으므로 참전한 첫 1주일 동안의 전투에서 행방불명 포함 4,525명의 병력과 3개 대대분의 장비를 잃었습니다. 전투에 처음 참여한 미군 전차인 M-24 경전차 8대는 북한군 T-34 전차 1대를 파괴하고 7대가 파괴되었습니다. 21연대는 1,433명을 잃고, 1,100명만이 남아 있었고, 34연대는 2,020명, 19연대는 2,276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미 24사단이 방어해야 할 북한군은 중전차 50대 이상의 지원을 받는 전투로 단련된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이었습니다. 당시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의 전투력은 60~80% 정도로 추산되었습니다. 물론 북한군들도 38선에서부터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진격해온 것은 아니지만, 북한군 사단의 병력이 11,000명이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병력은 미군보다 대략 두 배 정도 많았습니다. 1950년 7월, 미 24사단은 대전 북쪽에서 재난을 맞기 직전이었는데, 이는 단지 숫자가 적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북한군 4사단 16연대 소속 정찰대원으로 포로가 된 배준팔 소위의 진술에 의하면 북한군 4사단도 미군과 교전하며 8일 동안 5,000명에서 6,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고 했는데, 이는 북한군 4사단 편제의 50%에 해당되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미 24사단의 신속한 투입은 북한군의 공격을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가장 중요한 축선에서 2주간 지연시켜 북한군에게는 충격과 피해를 주었고, 국군에게는 사기 진작과 재편성 기회를 제공했으며, 후발대로 투입되는 미 25사단과 1기병사단의 전방전개를 위한 시간을 획득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미 지상군은 북한군이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빨리 투입됨으로써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 왔습니다. 미 지상군은 강력한 화력운용을 기반으로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에 북한군은 전차 단독에 의한 과감한 전진을 할 수 없었고, 정면 공격보다는 야간에 측후방 침투를 통한 후방 교란 및 차단작전 위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 24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에게도 많은 피해를 강요하여 작전지속 능력을 감소시켰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이 조기에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둘째, 국군의 사기 진작과 재편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국군이 한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6일간이나 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미 지상군의 증원이 곧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초로 투입된 미 24사단이 1번 국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을 담당함으로써 국군은 1군단을 창설한 후 중부지역으로 이동하여 북한군 2사단과 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동부지역의 6사단, 8사단과 연결하여 전선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셋째, 미 24사단은 가장 위급한 시기에 북한군 주력부대의 남진을 2주간이나 지연시켜, 후속부대인 미 25사단과 1기병사단이 상주와 영동 일대로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했습니다. 한편, 초기 전투에서의 연속적인 패배는 미군 장병들에게 전투공포증을 갖게 했습니다. 전투경험이 부족한 미군 초급간부와 병사들은 북한군이 측방 또는 후방으로 우회하면서 공격을 시작하면 전투력을 상실하고 탈출만을 생각하는 패배의식에 젖게 되었는데, 이는 차후 작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6.25전쟁에 대한 많은 영상이 있지만, 기초적인 사실 조차 확인하지 않은 영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도 조차도 사실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는 형편입니다. 6.25전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기 쉽게 정리하여 영상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참전했던 국군과 미군의 회고록, 미국 논픽션 전쟁사 작가의 간행물, 중공군 참전기록 등 다양한 정보를 교차 검증하여 가장 정확한 6.25전쟁 정보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되어 3년 1개월 2일 만인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민족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상처를 남긴 채 종전이 아닌 휴전의 형태로 정지된 비극적 전쟁입니다. 자유진영 전사자는 한국군 149,005명,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 40,306명 등 189,311이 희생되었습니다. 공산진영은 북한 294,000명, 중공 197,653명, 소련 315명 등 491,968명이 전사했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하여 5,991,484명이 희생되었습니다. 5,991,484명의 희생자 중 5,218,480명이 한국인입니다. 한국인 인명 피해로만 본다면 고구려-수나라 전쟁, 고려-몽골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모든 대외전쟁을 합친 것 보다 많습니다. 불과 70여 년 전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6.25전쟁은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습니다. [참고자료] 6.25전쟁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주요전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영웅(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중국군의 한국전쟁사(국방부, 군산편찬연구소), 낙동강(류형석, 플래닛미디어), 6.25전쟁 징비록(백선엽, 책밭), 기갑전으로 본 한국전쟁(권주혁, 지식산업사), 6.25전쟁과중공군(박실, 정미디어), 6.25전쟁(존 톨랜드, 바음), 콜디스트 윈터(데이비드 헬버스템, 살림), 이런전쟁(T. R. 페렌바크, 플래닛미디어), 6.25전쟁에서의 소부대 전투기술(러셀 구겔러, 북갤러리), 중국군의 한국전쟁사(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한국전쟁(왕수쩡, 글항아리),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학지, 한국학술정보), 항미원조(리펑, 다른생각) [영상 출처 :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