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24.09.01 예레미야와 미가(예레미야 26:16-19)
예레미야가 미가 2024년 9월 1일 예레미야 26:16-19 (26:16)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음이 부당하니라 (26:17) 때에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 말하여 가로되 (26:18)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26: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는 계속 보내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더욱 증가시키기 위함입니다 선지자는 한 두 번 보낸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돌아설 자들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간들의 죄는 세밀하고 깊이 내부에 박혀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힘으로 자기 죄에서 벗어날 자들이 아닙니다 도무지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릅니다 본심도 모릅니다 인간들이 아는 것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해서 그때그때 살아남기 위해 모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내가 살아있음’ 그것으로 모든 문제점이 다 해결된 것을 목표로 해서 행동합니다 즉 살아남은 자가 내세우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버티기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외치는 내용은 “너희들은 망한다”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이 믿고 싶어도 믿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육신과 마음과 안 망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바이기에 이 성향을 멈추거나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을 그냥 지켜보자는 식입니다 “잘못 했습니다 회개합니다”가 아니라 “선지자 당신 말을 귀담아 두고서 과연 추이가 성취되는 양상이 보이는지 여부를 우리 쪽에서 점검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과연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구경이고 관람이지요 예의도 배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점을 그들은 자신이 포기하면서까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는 겁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독자성’입니다 즉 인간은 아담이 악마로부터 부추김을 당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독자성을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여타의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은 따먹지’라는 하나님의 당부에 의해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하등의 불만을 갖고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악마가 접근하면서 ‘허락되지 않는 나무 과실’에 대한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지 말랬지만 나는 해낼 수 있다’가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독자성(獨自性)입니다 독립해서, 혹은 자립적으로 존재하고 싶었던 겁니다 ’나의 삶‘을 ’나만의 삶‘으로 전환하고 싶었던 겁니다 오늘날 인간들에 있어 이런 성품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타인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도 나의 독자성은 근거로 당당한 자신만의 소리를 내고 싶은 겁니다 이는 내 주위에 궁극적으로 ’아무도 없음‘을 합당하게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악마는 마치 인간을 생각해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주도권이 다 주어진 것처럼 해놓고서는 조종대상으로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악마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 자신이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그 성질을 그대로 인간 내부에 심어놓은 겁니다 이점을 하나님께서도 너무 잘 아십니다 인간이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한다는 점을 아십니다 첫째, 인간은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한다 둘째는 이 시도의 최종점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복의 조건도 있지만 문제는 저주의 조건도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 상반된 결과를 인간에게 제시하므로서 인간들은 저주받지 않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인간들의 독자성은 더욱 더 강화됩니다 “하나님, 이 정도로 제대로 하면 되겠지요? 나름대로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로서 최선인데 따라서 준비된 복은 저에게 주실 줄 있지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독자성을 포기못함을 아시고 복과 저주의 기준을 더욱 더 강화하십니다 선지자를 계속 투입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안일하게 잘지켰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요건을 갖춘 율법적 요구사항을 추가적인 선지자의 투입으로 해서 안겨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미가 선지자 이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온 겁니다 미가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미 1:3-5) ‘너희 이스라엘 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들은 그때 당시 유다 땅은 안 망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상 숭배에 열중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인간의 노력으로 고쳐지는 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를 놓고 죽이자는 자와 살려두자는 쪽이 각각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다 나라가 안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누가복음 19:9-10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인간들 스스로 자신이 구원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충실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장하다고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손 내밈’이며 ‘건져 내심’입니다 죄인 쪽에서 주님쪽으로 손을 내미는 식이 아니라 주님쪽에서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은 자신이 지닌 성실상 가만있지 않고 뭔가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은 역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나 유대민족에서 늘 언급하면서 멸망을 선언하는 이유는 한결같이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이 어떤 식이냐 하면 인간의 독자성에 바탕을 둔 신입니다 즉 하나님쪽에서 어떤 지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 자신들이 알아서 복과 저주의 법칙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즉 “이런 식으로 나름 노력했으니 신께서는 복 주셔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독자성을 중도로 사라질 리가 만무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신약에 친히 ‘잃어버린 양’을 찾는 식으로 구원하는지 그 이유가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해서 마련되어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심이 우리가 알아서 고치지 않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