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알고 입자!] 알렉산더 맥퀸의 삶

[디자이너 알고 입자!] 알렉산더 맥퀸의 삶

오버솔 스니커즈 상당히 핫한 신발이었죠? 오버솔 스니커즈의 브랜드 창시자인 영국의 천재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해골하면 떠오르는 디자이너이자 암울한 끝을 맞이한 비운의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입니다 알렉산더 맥퀸은 196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 어머니는 사회학 교사였습니다 맥퀸은 그런 부모님의 6명의 자녀 중 막내였고 이러한 가정에서 검소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 중에는 예술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맥퀸은 어려서부터 패션에 관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또래들은 패션을 좋아하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이름인 Mcqueen을 Mcqueer 라 비웃으며 동성애자라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던 1986년 맥퀸은 어머니와 TV를 보다가 맞춤 양복점이 모여있는 런던의 새빌 로에 수습생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에 맥퀸의 어머니는 “저기 가보는 게 어때?”라고 권했고 항상 디자이너를 꿈꾸던 맥퀸은 16살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새빌 로에 있는 양복점 앤더슨 앤드 셰퍼드에서 고용되어 미하일 고르바쵸프 와 찰스 왕세자의 맞춤옷을 제작합니다 이후 맥퀸은 웨스트 햄프턴 기술 전문대학의 예술 과정 야간 학부를 이수합니다 졸업 후 맥퀸은 일본 디자이너인 런던의 요지 야마모토와 로메오 질리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런던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됩니다 이후 1990년 다시 런던으로 돌아간 맥퀸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에서 패턴, 재단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려 하지만, 패션을 더 전문적으로 배워 보고 싶었던 맥퀸은 되려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이후 1992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그해에 그가 참여하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 작품전이 시작됩니다 그는 졸업 작품으로 전통 의상을 재해석한 ‘범퍼 바지’ 등을 선보입니다 그런 맥퀸의 졸업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인물은 이사벨라 블로우 그녀는 유명 패션 에디터이자 전 영국 보그의 편집장으로 패션계에서 상당한 입지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당시 이사벨라는 맥퀸이 졸업 작품으로 제작한 코트가 맘에 들어 사려고 하는데 맥퀸이 코트의 가격이 350파운드라고 하자 이사벨라는 가격이 너무 싸다며 맥퀸의 모든 작품을 일주일에 100파운드씩 내는 조건으로 5천 파운드라는 거액에 사들입니다 1년 할부를 한 셈이죠? 이사벨라는 이 돈을 갚기 위해 고생을 좀 했다네요 그렇게 이사벨라 블로우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학생의 졸업 작품을 모두 구매했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며 맥퀸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의 디자인 또한 많은 인기를 얻으며 맥퀸은 순식간에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사벨라가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천재 디자이너를 발굴한 것이죠 이때부터 이들은 절친한 사이가 됩니다 이후 맥퀸은 자신의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을 런칭합니다 브랜드를 런칭하며 맥퀸은 Low - rise Jean을 선보였는데 이는 엉덩이 선이 내려간 바지입니다 처음에는 엉덩이가 보이고 흉측하다는 이유로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이후 엄청난 유행을 타게 되며, 맥퀸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됩니다 그리고 또 알렉산더 맥퀸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해골이죠? 맥퀸은 대담하고 어둡고 낭만적인 성격과 폭력적이고 괴이한 디자인 요소로 주목을 받습니다 좀 난해하죠? 맥퀸의 쇼를 보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맥퀸은 자신의 쇼를 평범하지 않게 연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쇼를 통해 사회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몇 가지 예로 맥퀸의 1994년 F/W 컬렉션은 영국에 점령당한 스코틀랜드 고산 지방에서 영국 병사들이 스코틀랜드 여성들을 강간한 사건을 주제로 한 “하이랜드 레이프”라는 제목의 컬렉션을 선보였고, 이때 임신한 여성을 표현한 모델이 등장해 충격을 줍니다 그리고 1999년 S/S 컬렉션의 엔딩은 현재까지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힙니다 이 쇼의 엔딩은 하얀드레스를 입은 모델 샬롬 할로우가 무대 중간에 서 있고 양쪽에 세워진 로봇들이 드레스에 페인트를 뿌리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맥퀸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맥퀸은 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한 미국의 육상선수이자 현재는 배우로 활동 중인 에이미 멀린스를 모델로 써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S/S 컬렉션은 모델들이 체스 말처럼 움직이게 하는 인간 체스판을 만들어 극찬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컬렉션 연출과 쇼에 등장하는 디자인들로 맥퀸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인정받게 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와서 1996년 LVMH는 지방시의 존 갈리아노를 디올로 옮긴 후 지방시의 새로운 디자이너로 알렉산더 맥퀸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지방시와 맥퀸의 조합 어울리지 않았던 걸까요? 오드리 햅번의 지방시와 해골이 떠오르는 맥퀸이 대중들에겐 거부감으로 작용합니다 그렇게 1997년 첫 컬렉션은 대실패 총 4년간 연 2회의 쿠튀르 쇼와, 2회의 레디 투 웨어 컬렉션 모두 실패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맥퀸은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 상을 받습니다 맥퀸은 1996년과 97년, 2001년과 03년 이렇게 총 4번의 수상을 합니다 그러나 지방시에서는 맥퀸의 과감하고 과장된 창의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2000년 계약 만료 후 맥퀸은 지방시를 떠나 개인 브랜드에 집중합니다 그는 향수를 포함하여 브랜드를 다각화하기 시작했죠 그러던 2007년 5월 맥퀸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은 자신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만들어준 인물이자 그의 절친 이사벨라 블로우가 제초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으로 맥퀸은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친구를 잃은 슬픔과 동시에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0년 2월 2일 그의 어머니 조이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맥퀸은 심한 불안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이에 그는 희망을 놓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러한 말과는 다르게 어머니의 장례식이 열리기 하루 전인 2010년 2월 11일 맥퀸은 자택에서 목을 매어 사망한 채로 발견됩니다 이에 여러 언론과 디자이너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맥퀸을 애도하는 물결로 가득했고 많은 셀럽들도 그를 애도합니다 특히 맥퀸의 절친이자 그의 옷을 좋아했던 레이디 가가는 추모 콘선트에서 맥퀸을 애도하는 노래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맥퀸은 천재적인 디자인 실력과 쇼 연출력으로 영국 최고의 디자이너로 활약했습니다 비록 그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맥퀸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디자인들로 패션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