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인천지부장 박정우님" 연주! 꼭~ 들어 보세요 얍!
#이애리수황성옛터 #하모니카 #박정우 ★하모니카 연주(공연), 강의, 악기,교재 구입 문의 사항은 이혜봉회장님 010 5325 1313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황성옛터'는 '전수린(全壽麟)' 작곡하고 '왕평(王平)'이 작사한 '이애리수(李愛利秀)' 노래로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에 한국인이 작사작곡하고 노래한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8년 늦가을, 악극단 취성좌(翠星座) 멤버들이 지방공연을 위해 황해도 배천에 왔을 때, 비가 내려 공연을 할 수 없어 모두 여관에서 할일 없이 죽치고 있게 되었다 극단의 배경음악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은 창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전속 극작가 '왕평'과 함께 들렀던 자기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와 '고려성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500년 전에 번성하던 고려 왕도 개성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있는 옛 궁궐의 주춧돌과 흐트러진 성벽의 일부만 초라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이 지금 일제 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과 자기들의 서글픈 신세와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왔던 기억들이, 창밖에 내리는 비속에서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들어 그 착잡했던 심정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왕평'이 이 선율을 악보화 하도록 하고 스스로 가사를 지어 붙인 것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즐겨 부르고 있는 ‘황성옛터(처음 제목: 황성의 적(荒城의 跡)'가 된 것이다 당시 새 노래가 나오면, 신파연극 공연의 막간에서 부르는 '막간가요'로서거나, 아니면 활동사진이 상영되는 극장무대 아래서 반주 팀이 부르는 주제가로서 불리어져 대중에게 전달, 확산되었는데, ‘황성의 적‘은 막간에서 앳띤 미녀 가수 '이애리수'가 막간에 나와 불러 인기를 끈 막간가요였다 1932년 발매된 '황성옛터'의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판매되면서 그 인기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애리수'는 1930년대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나 가정주부로 생활하며 종적을 감췄다 그녀는 개성 출신으로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하며 막간가수로도 무대에 올랐으며, 18세 때 '황성옛터를 부르며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그녀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남편 배동필을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가수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애리수'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2남7녀의 어머니로서만 살아왔다 당시 남편의 집안에서 가수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기 때문이다 극단 '취성좌(뒤에 조선연극사)'가 서울의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이애리수 자신도 이 노래의 노랫말과 선율에 담긴 비통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여 3절을 부르다가 흐느껴 울어버린 해프닝이 생겼다 가수가 부르던 노래를 중단한 것은 큰 실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관중들의 감동을 일으켜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재청이 터져 나왔다 이애리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를 불렀으나, 순조롭게 흐르던 선율이 어느덧 흐느끼면서 또 다시 노래반, 울음반이 되고 말았다 가수도 관객들도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고, 떠나갈 듯한 박수 속에 앵콜이 요구되어 다음 막의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은 묻히고, 일곱번이나 앵콜을 받아야 했다 관중들은 열광하며 따라 불렀고, 언제나 노래의 3절에 이르러서면 가수와 관중 모두가 노래 반, 눈물 반이 되어버렸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눈물의 합창이 나오게 되자, 종로경찰서 임석 일본 경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켰고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이 노래의 작사자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서에 끌려가 밤을 세워가며 조사 받고서야 풀려난 적이 있었고, 총독부는 한때 이 노래에 대해 금지곡 처분을 내리기도 했으며,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혼 후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살았던 '이애리수'는 100수를 누리고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