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악성종양 러소포비아, "냉전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 사태이후 러소포비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전쟁을 하니 미워할 수는 있으나 문학, 예술같은 분야에서까지 광기어린 러시아혐오가 대단합니다. 이에 대해 주미 러시아 대사 아나톨리 안토노프가 로시스카야 가제타에 게재한 뒤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린 에세이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에세이 제목은 Russophobia as a malignant tumor in America. 악성종양같은 미국의 러소포비아입니다. 그의 에세이는 미국의 군사전문가 스콧 리터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에세이를 소개했습니다. 굉장히 잘 쓴 에세이입니다. 안토노프 대사는 에세이에서 러시아는 항상 모든 국가의 풍부한 문화적 전통을 숭배하고 존중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간의 관계가 아무리 복잡하더라고 문화는 항상 국민간의 신뢰를 강화해야 하는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안토노프 대사는 그러면서 냉전시대도 문화 Cancel은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미국인인 Van Cliburn이 우승한 사실을 들었습니다. 냉전이 절정이었던 시기에 Van Cliburn은 모스크바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공연은 장벽을 허물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러미간 상호이해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줬다고 안토노프 대사는 말했습니다. 키가 크고 곱슬머리인 텍사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Van Cliburn이 모스크바를 정복한 사연은 전설적입니다. 냉전의 해빙을 위해 미소 양국은 일련의 문화교류를 제한했고 소련은 1958년 처음으로 제1회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를 열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미국에서도 1812년 서곡,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는 전세계 19개국에서 50명의 음악가를 초청해 소련예술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그리고 전설적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이끄는 심사위원단이 구성됐습니다. 그런데 Van Cliburn이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차이콥스키 곡중에 가장 친숙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 모든 관중을 일어서게 했습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연주를 했습니다. 심사위원 쇼스타코비치도 감동했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Van Cliburn이 우승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냉전시기에 그에게 1등상을 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물어봤습니다. Van Cliburn에게 상을 줘도 되냐고 묻자 흐루쇼프는 그가 최고냐고 쇼스타코비치에게 물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흐류쇼프는 그러면 그에게 상을 주라고 흔쾌하게 대답했습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한 Van Cliburn은 영웅이 돼 개선했습니다. 미국인들으 뉴욕의 Avenue of Heroes에서 퍼레이드도 벌여줬습니다. 타임지는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Van Cliburn이 우승하기 6개월 전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시켜 미국에 충격을 줬습니다. 또 조 매커시도 폭군과 살인자에게는 우정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하는등 미소간의 경쟁심과 감정대립은 최악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Van Cliburn이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은 해빙에 도움이 됐다고 안토노프 대사는 말했습니다. 큰 정치의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예술의 보편적인 언어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지금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이벤트가 된데에는 Van Cliburn의 우승영향도 컸습니다. 안토노프 대사는 그러나 우크라이나 분쟁이후 무차별적 러소포비아 속에서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2022년 4월 13일 세계국제음악콩쿠르연맹에서 제외됐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당시 콩쿠르연맹은 보도자료에서 많은 차이콥스키 수상자들이 오늘날의 주요 예술가이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 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하고 홍보도구로 사용하는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회원으로 인정하지 않겠가고 말했습니다. 안토노프 대사는 2003년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이라크를 노골적으로 침공했지만 Van Cliburn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세계국제음악콩쿠르연맹의 설립취지는 공모를 통해 클래식음악분야에서 유망한 젊은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지 정치참여가 아니라는게 안토노프 대사의 견해입니다. 그는 또 차이콥스키 거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2023년 모스크바와 상뜨 뻬쩨르부르크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는 미국을 비롯한 14개국 128명의 영재들이 참가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러시아 증오 바이러스인 러소포비아는 그야말로 미국에서 자라고 있는 종양입니다. 러소포비아의 바이러스는 미국의 미술관도 감염시켰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대표적입니다. 안토노프 대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러시아의 위대한 화가 아르힙 쿠인지, 이반 아이조프스키. 일리야 레핀을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했다고 개탄했습니다. 인종적으로 일리야 레핀은 러시아인,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아르메니아인, 아르힙 쿠인지는 그리스인이기는 하지만 모두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인식했는데 뜬금없이 우크라이나인으로 바꾼것입니다. 세사람이 생존했을 당시 우크라이나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일리야 레핀이 추게프, 아이바조프스키가 페오도시아, 아르힙 쿠인지가 마리우폴에서 태어났다고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일리야 레핀의 경우 그의 부친은 러시아 군대의 울란연대에서 근무했고 레핀 자신도 상뜨 뻬쩨르부르크의 제국 미술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사실 마리우폴이나 오데사 같은 지역에는 그리스계 러시아인이나 아르메니아인 투르키인들도 많이 거주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은 예카쩨리나 여제때 러시아 제국으로 편입시킨 곳입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의 경우 인종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일 수는 있지만 러시아는 그를 역대 해양예술의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평생 6천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 해군의 공식 예술가로 임명됐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지나친 것 아니냐는 항의를 받자 아이바좁스키의 국적을 이번에는 아르메니아로 바꿨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이딴짓을 벌인 것은 우크라이나 미술사학자라는 타이틀의 옥사나 세메닉의 사주를 받은 것입니다. 옥사나 세메닉은 그러나 단순한 미술사학자라기 보다는 문화 저널리스트로 불리며 친우크라이나 반러시아 선전을 해온 인사입니다. 그녀의 활동을 돕는 이 가운데 나탈랴 구메뉵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미국 CIA가 설립한 NGO NED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NED,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는 이름부터 그럴 듯 해보이지만 사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문화공작을 하는 단체입니다. 앞서 메트로폴리탄이 러시아 화가를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하는 황당한 짓을 했다고 전혀드렸습니다만 압권은 또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의 저 유명한 러시아 무희들을 우크라이나 무희로 바꾼 사례입니다. 프랑스의 거장 에드가 드가가 파리순회공연중인 러시아 제국 발레단 무용수를 묘사한 작품이 러시아 무희들인데 그런 역사적 맥락도 무시하고 우크라이나 무희로 바꾼 것입니다. 아무리 우크라이나와 연대한다는 구호를 내세워도 용납될 수 없는 문화파괴 취소행위입니다. 스콧 리터는 오늘날 미국에서 러소포비아가 기승을 부리는 근본적인 이유로 진정한 전문가가 없다는 점을 거론했습니다. 잭 매틀록 전 주러미국대사나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븐 코헨 러시아 슬라브학 교수같은 전문가들이 학계에서 전멸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에서 주러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 NSC의 러소포비아적 전문가 피오나 힐 같은 외눈박이들이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고 스콧 리터는 진단했습니다. *자발적 후원 기업은행 222-011792-02-013 박상후 PayPal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