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니면 표징]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 2025 02 17](https://krtube.net/image/s5d74qBqxcg.webp)
[사랑 아니면 표징]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 2025 02 17
2025년 다해 연중 제6주간 월요일 – 사랑 아니면 표징 제가 이번 주에 휴가이기 때문에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복음 묵상은 없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휴가 잘 다녀와서 주일에 뵙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마르 8,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미 무수히 많은 기적과 치유, 죄인들을 품어주신 사랑으로 충분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더 확실한 것”을 원하고,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될 만한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속에는, 사실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불신”과 “자기 이기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에 탄식하시며, 곧장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마르 8,13 참조). 이는, 이미 베풀어진 사랑을 외면하고 ‘더 큰 이득’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불신과 이기심이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례를 역사와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빈의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산모들의 산욕열을 막기 위해 “손을 씻자”고 호소했지만, 권위와 이익을 중시하던 동료 의사들에게 무시당한 채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부족해 보이고, 가난해 보이는” 제멜바이스의 호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귀를 닫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주어진 도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만 표징을 요구하는 태도가 낳은 파멸적 결과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미녀와 야수’ 이야기에서는 왕자가 겉모습만 보고 늙은 여인을 멸시했다가 야수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 이익과 편의를 좇는 태도 앞에서 외면당하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런 예들은 모두 “이미 드러난 사랑과 선의를 깎아내리고, 자신이 원하는 이익과 눈에 확 띄는 기적만을 고집하면” 스스로를 구할 길이 막힌다는 교훈을 전해줍니다. 반면, 외적인 표징보다도 “나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해 주는 마음”을 깨닫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이들은 놀라운 구원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실제 사례로, 닉 부이치치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 절망과 좌절 속에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왜 하느님은 내 팔다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원망에 시달렸지만, 어느 날 요한 복음 9장의 태생 소경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참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새 팔, 새 다리를 자라나게 해 주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 뒤, 더 이상 표징을 강요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장애를 통해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큰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닉 부이치치는 강연과 선교 활동을 통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받은 사랑”을 바라본 결과, 절망에서 벗어나 오히려 다른 이들을 살리는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주교에게서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쳐 달아났지만, 경찰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주교는 장 발장을 비난하거나 처벌하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은촛대까지 내주며 “나는 당신을 믿는다”고 말해줍니다. 장 발장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돈이나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고 사랑해 주는 손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그는 도망치듯 살던 지난 삶을 청산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길로 나아갑니다. “사랑”이라는 표징은 이미 자신 곁에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식은, 사랑의 표징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않는 이에게 “더 이상 너희에게 줄 표징이 없다”라는 선언입니다. 이미 내 곁에 주어진 사랑을 외면한 채, ‘그보다 더 큰 이익’을 요구하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닉 부이치치나 장 발장처럼, 그 희생과 사랑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구원과 성장의 길이 열립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짧은 이야기 하나가 이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하느님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곧 작은 배가 오고, 또 큰 배가 오고, 마지막엔 헬리콥터까지 왔는데도, 그 사람은 “나는 하느님의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을 기다린다”고 말하며 모두 거절했습니다. 끝내 익사한 뒤에 그는 하느님께 “왜 저를 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항의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미 작은 배도, 큰 배도, 헬리콥터도 보냈는데 네가 다 물리치지 않았느냐?”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사랑과 구원의 손길도 놓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선한 사람은 “나에게 베풀어진 희생과 사랑”을 먼저 바라보고, 악한 사람은 오직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만을 바라보다가 정작 자기 자신을 살려 줄 손길을 외면하게 됩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이기심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와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충분히 알아보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나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건네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의 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