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복음사가 축일 / 2024년 12월 27일 /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 / 대전 노은동 성당 / 매일 강론
성 요한 복음사가 축일 / 2024년 12월 27일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 / 대전 노은동 성당 / 매일 강론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 [원고 보기] 1요한 1,1-4; 요한 20,2-8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 주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물론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자 형 야고보와 함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후에 역시 형과 함께 찾아가서 “당신께서 영광 받으실 때 저희를 당신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주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때로는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요한 사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를 직접 썼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 연구 결과, 사도께서 직접 복음서와 서간을 쓰신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돌아가신 후 그 영향 아래에 있던 공동체에서 복음과 서간들이 저술된 것이라 추측하고, 그 공동체를 요한 공동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사도 요한을 의미할 수 있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인 우리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탄 축제가 한창인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이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이를 두고 ‘역시 젊어서 빨랐다’는 해석도 있고, ‘사랑하는 그만큼 더 빨리 달린 것이다’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베드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다른 제자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요한이 더 빨리 달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더 빨리 도착했으면서도 베드로가 무덤에 먼저 들어가도록 양보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복음과 요한 서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요한은, 무덤에 다다르자마자 들어가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 때와 달리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더 우위에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잘 이루어나가라며 베드로 사도에게 수위권을 주십니다 요한은 자신의 감정보다 이 질서를 더 중요시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께서 더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제 그 소식을 듣고 열두 사도 중 첫 목격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당신이 영광 받으실 때 저희를 당신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의 사도 요한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러고 있는지 살펴야겠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분별 있는 사랑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나셨듯이 닫힌 무덤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당신 어머니의 맏이로 나셨듯이, 당신의 부활에서도 죽은 이들 가운데 맏이가 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