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옥수수와 나」

김영하, 「옥수수와 나」

“자기를 옥수수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치료를 받고 강박관념을 떨쳐냈다 하지만 닭은 여전히 그를 옥수수로 알고 계속 쫓아다닌다고……” 김영하, 「옥수수와 나」 언젠가 카페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너는 그 여자를 뭐라고 부르니?” 이제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는 왕년의 프로레슬러처럼 생긴 카페는 여자 얘기를 할 때면 약간 수줍어하곤 한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별명으로 불러 걔한테 내가 붙여준 별명이 백 개도 넘을 거야 만날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거든 무의미할수록 좋아 ‘나의 다리 부러진 의자’라고 부를 때도 있고 ‘매우 공허한 찐빵’ 이라고 부를 때도 있어 ” “헤이, ‘섹스 파트너’ 라고 부를 때는 없어? 장난으로라도? 아님 ‘섹파’ 같은 준말로라도 ” “요즘 어떤 엄마들은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더라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엄마들이 어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것 같아서 아슬아슬해 아들이라고 부르는 순간, 엄마와 아들 사이에 어떤 완충지대도 없어지는 거야 섹스 파트너라는 말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내 말은, 프라이팬에 뭘 구우려면 말이야 먼저 기름을 둘러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서로 들러붙지를 않지 ” “잠깐, 그런데 그 여자, 뭐 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 “너한테 얘기해준 적 없는 것 같은데 ” 유도신문은 나의 장기이지만 단련된 사람에게는 잘 안 먹힌다 “알았어 그럼 다시 물어볼게 그 여자 뭐 하는 사람이야? ” “여군 장교야 ” “정말? ” “내가 주말마다 차를 몰고 강원도로 가 근무지는 최전방이야 좁은 동네라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하니까 그녀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변장 수준의 화장을 한 다음, 좀 더 후방에 있는 도시로 나와서 나와 접선을 하지 ” “ 그랬군 ” “난 어릴 때부터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좋았어 ” 그의 몸짓이 더욱 수줍어진다 “ ‘유니폼을 입은 여자’라는 말도 일종의 기름 같은 건가? ” “맞아 덕분에 나는 ‘유니폼 입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로 살 수 있는 거지 역시 소설가라 그런지 금방 이해하는군 ” “그 여자는 너와 만날 때에는 사복을 입지 않아? ” “물론 사복이지 하지만 그녀가 나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왔다는 것 그게 나를 흥분시킨다고 다른 여자들은 옷을 ‘입고’ 남자를 만나러 오지만 그녀는 옷을 ‘갈아’ 입고 오는 거야 ” 자기 말에 취해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카페는 자기 아내가 철학과 주기적으로 만나 ‘섹스를 한다’라는 무거운 관념을 던져버리고 온다는 걸 모르고 있다 고래로 이런 진실은 남편이 가장 늦게 알게 된다 카페의 아내와 철학 역시 카페가 최전방에서 여군 장교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카페가 낚시에 미쳐 있다고 믿고 있다 작가-김영하 소설가 1968년 강원도 화천 출생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동대학원 석사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함 『호출』『아랑은 왜』 같은 도발적 상상력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작품을 쓸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도 전세대의 지사적 풍모나 고루한 지식인적 행보 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전위는 또 다른 전위에 의해 전복되기 마련이다 낭독_ 조주현 - 배우 연극 '사랑을 묻다', '공장', '복사꽃지면 송화날리고' 등에 출연 낭독_ 이현균 - 배우 연극 '뽕짝', '졸업작품', '맘모스해동' 등에 출연 *배달하며 남자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고 하는 일인, ‘카페’로 불리워진다 그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도 만날 때마다 더욱 자극적인 별명으로 이름이 바뀐다 두 사람 사이엔 사랑은커녕 최소한의 책임이나 연민도 없다 그저 몸으로 탐하는 흥분이 있을 뿐 몸으로 탐하지 않을 때는 난삽한 언어의 희유로 변형된 흥분을 즐긴다 실체는 도외시되고, 하는 일과 하는 말이 존재를 대신하는 시대, 지금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 출전-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옥수수와 나』 (문학사상사 2012년) 음악_ The Film Edge-Themes-Concepts 중에서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양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