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기독교단 75주년 기념 영상 한국어 자막 버전

태국 기독교단 75주년 기념 영상 한국어 자막 버전

태국 기독교단 75주년 기념 영상 한국어 자막 버전 태국어만 나오는 버전이 힘드실 것 같아서 자막을 추가했습니다 제가 함께 동역하며 일하는 태국기독교단입니다 태국내 가장 큰 교단이고, 전국에 노회 조직이 되어 있는 교단입니다 태국선교 역사의 주축이었던 미국장로교 선교부가 이룬 선교를 바탕으로 설립된 교단이기에 태국 개신교에서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비록 태국어로 된 영상이지만, 역사적 영상이기에 소개합니다 저는 그중에 방콕에 소재한 6노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보시고 함께 맥락을 이해 주시면 태국선교를 이해하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태국 개신교 역사 - 태국기독교단 포함 (최승근선교사 논문중에서) 1 개신교 선교의 시작 (1816∼1862) : 당시 태국은 사이암왕국(한국의 조선격) 개신교에 의한 태국 개신교 선교역사는 1816년부터 시작된다 사실 태국인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복음전도는 버마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의 부인 앤 저드슨(Ann Hasseltine Judson) 선교사에 의해서 버마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짜크리(Chakri) 왕조의 제 4대왕 몽꿋(Monkut)왕 때에 중국에서 사역하던 칼 구츨라프(Carl F Gutzlaff)와 야곱 톰린(Jacop Thomlin)이 1928년 최초로 태국에 들어 와서 선교사역을 펼쳤다 본격적인 선교는 목사이며 의사이며 행정가인 브래들리(Aan B Bradley) Aan B Bradley, 태국에서 38년간 사역하는 동안 그는 의사, 인쇄업자, 선교사, 정부 고문, 비공식 대사로 활약하여 명성을 쌓았다 가 입국하면서 더욱 발전의 기틀을 닦게 되었다 이 시대에 싸이암 정부와 국민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행정적인 면에서 선교사들에게 매우 우호적으로 협조를 해 주었다 2 개신교 선교의 발전 (1863- 1938) 1864년 입국한 윌리엄 딘 선교사는 방콕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벌렸다 북부 라오족의 선교는 신화적 선교사인 맥길버리(D McGilvary)와 윌슨(J Wilson)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맥길버리는 의료선교와 구제선교를 베풀며 독자적인 순회 선교로써 선교의 범위를 넓혀 갔다 박해가 있은뒤 선교사들이 1878년‘종교관용의 칙령(The Proclamation of King Chulongkoern's Edict of Religious Toleration)'이 선포되어 본격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태국 남부 주민들의 복음에 대한 반응은 많이 달랐다 남부의 선교사들은 그 영적 황무지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태국 중부도 성장이 더뎠다 교회의 성장운동은 1884년 10월에 시작됐다 매달 최소한 22명의 새신자가 있었으며, 이것이 61개월이나 계속하였다고 말한다 성장은 몇가지 상황 가운데 발생하였는데 첫째로 교회와 선교지부의 확장, 둘째로 중국인의 높은 수용성, 셋째로 기근과 질병에 대한 구제활동이다 1884년 이후 1910년까지 급성장을 이룩해온 교회 성장이 그 이후 30년간이나 정체의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에 교회 성장률은 0 7%를 나타냈다 기독교 선교에 늘 포용적이던 쭐라롱껀(Chulongkoern) 왕의 죽음(1910 10 )과 선교부가 개인 신앙의 양육과 보살핌에 소홀하였던 것이 주요 원인이다 증가한 학교들을 운영하기위해서 안수 받은 태국 교회 일꾼들이 교회를 떠나 학교에서 가르치도록 임명되었고 많은 교회들은 포기되었다 지도자나 목자 없이 방치되었고 교회의 확장은 멈추었다 3 존 성(John Sung)의 부흥운동 (1938-1940) 존 성(John Sung)은 1938년에 처음으로 태국에 왔는데, 그의 설교를 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큰 확신을 얻었다 존 성(John Sung)의 부흥 메시지는 감정적으로 냉랭했던 싸이암 국민들에게 충분한 충격을 줄 만큼 매우 강했고, 그의 가르침과 간증은 매우 힘이 있었다 부흥을 위한 그의 사역의 결과, 태국 남부에 있는 뜨랑에서부터 북부 치앙마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태국교회들이 기도회를 열게 되었다 많은 평신도 그룹들이 전도팀을 구성하여 전도사역을 활발히 펼쳤다 4 교회의 시련기(1941- 1945) 2차 대전으로 일본이 태국에 진입하여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추방 명령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지도자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국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시험과 연단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몇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불교로 되돌아가기도 했고, 불교 승려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1940년 10,700명이었던 신자는 6,000- 7,000명의 숫자로 급격히 감소했다 신자의 배교 현상은 특히 태국인 교회에서 심하였다 5 교회의 성장기 (영적부흥 고대기) (1946-198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태국교회는 각 지역의 교회들을 다시 소집했다 1945년 10월에 태국교회는 그 동안 전쟁을 인해 소집할 수 없었던 총회를 소집했다 이 태국교회 총회(CCT)는 태국교회 스스로 계획한 첫 총회였다 이 총회는 선교사들이 서둘러 귀임해 줄 것을 부탁하자는 결의와 교회와 각 교인들이 전도에 힘쓸 것을 결의했는다 전쟁의 종식은 태국교회의 재생의 불길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나고 교세는 또 다시 급성장하였다 간접적인 큰 요인은 태국교회가 분열함이 없이 교단이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 재건을 위한 연합활동 등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국기독교단(CCT)은 1976년 복음주의 노선의 선교회들과 교회들이 분리되어 태국 복음주의 협의회(EFT: 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를 형성하는 분열을 겪게된다 태국선교역사 중에서 발췌(태국기독교단 : CCT 역사, 조준형 선교사 글) 1920년에 사이암 선교회는 가장 활동적이고 성장하는 센타가 되었으며 이 선교 단체는 CCT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냈는데 그 새로운 움직임은 CCT를 구성했던 장로교회의 두 선교 단체가 토착교회를 설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 갔지만 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1902년-1923년 까지 태국인 지도자들이 교회를 계속해서 짓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계속해서 1925년 사이암의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 센타와 자신들의 사역을 되돌아보았다 그때에 선교사가 태국인으로 하여금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한 파트너로 인정하여 그들이 교회를 다스리게 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같은 해에 복음 전도위원들이 이 새로운 계획으로 사이암국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두드러진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1928년 태국 기독교장로회 100주년에 태국 자치 교회들로 하여금 열심 있게 사역하도록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 예루살렘 회의에 대표를 보냈다 이 대표가 1925년에 돌아와서 태국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 단체로 구성되는 이른바 Mott회의라고 불리우는 회의를 통해 싸이암 민족기독협의회를 만들면서 민족 자립 교회의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사이암 민족 기독협의회는 1930년 1월 6일 태국내에 있는 여러 선교 단체들인 미국 장로교회 위원회, 영국 기독교 단체, S P G 단체, 미국 그리스도 연합회, 태국 장로교회 대표 등 여러 기관의 단체 대표 18명이 모여서 사이암 기독교단 회의를 열었다 1932년 4월에 사이암과 라오스 장로교는 태국 교회를 자유롭게 치리하기 위한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고 이 위원회에서는 두 교단이 서로 돕고 소식을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총회지인 '교회소식'을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1933년까지 임시 총무가 이 연합교단에 있었으나 1934년 4월에 사이암내의 교회들이 사이암 내의 교회들로만 구성되는 새로운 위원회의 결성을 요구하는 것이 새로운 총회의 헌법으로 받아들여져 정식으로 사이암 기독교단이 결성되게 되었고, 첫 번째 창립 회의 때에는 미국 장로교회와 중국 침례교회가 사이암 기독교단을 구성하였다 사이암 기독교단의 최초의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회장-쁘르엉 쑤티캄 목사, 총무-Mrs 아짠 위타야 콤, 부총무-분막 낏대산목사 와 회계에는 타이용선생 #태국선교 #태국기독교단 #최승근선교사 사이암 기독교단 초기에는 전체 교회를 7개의 노회로 조직했으며 아직은 선교사들에게 의지해야만 하기에 사이암 민족 기독협의회를 재정적인 후원자로 두고 있었다 1939년 사이암왕국이 태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함에 따라 사이암 기독교단은 태국 기독 교단이라는 CCT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2차 세계대전에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CCT는 재정과 그밖에 모든 CCT 운영의 문제들을 안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립에 더욱 많은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후에 민족주의 자각 운동으로 여러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재산과 학교와 병원이 모두 정부의 것이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자 CCT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새해에는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서 CCT와 다시 사역을 계속해 나간 결과 2개의 노회를 더 만들었고 이 노회는 태국인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함께 다스리게 했다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서와 기관들을 조직했으며 이들은 총회의 기구로서 부서들 및 부속 기관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