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리 스튜어트 여왕에 이어 참수당한 손자 찰스1세의 비극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와 덴마크의 아나의 차남이다. 제임스 1세가 사망한 후 차남인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차남이긴 하나 형이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사실 막 즉위한 찰스가 당면한 문제는 그의 아버지 대부터 있었던 문제이다. 튜더 왕조 시절 초기에는 헨리 7세 시절 대부분의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몰락하고 왕실에서 패배한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면서 귀족 가문은 30여 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튜더 왕조는 재정적으로나 권력으로나 절대 우위를 누리며 절대왕정 시대를 누렸다. 제임스 1세는 강력한 왕권을 원했다. 사실 제임스 1세의 구상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까지 통합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이유이었다. 실제로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통합된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 통합을 위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건설하려 했다. 당연히 의회는 심하게 반발하였다. 섬나라인 영국에서 육군을 만들 필요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은 전쟁이 수도없이 벌어져 육군의 비중이 커진 일본과 달리 이 정도로 전쟁이 많이 벌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육군을 대규모로 양성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육군을 만들면 대체 그 창끝이 누구한테 가장 먼저 향할 지는 뻔할 뻔자다. 사실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갈등했는데 상비군의 양성은 바로 귀족들을 억누르는 것이라서 귀족들이 좋아할리가 없어서 기를 쓰고 상비군 양성을 방해 했다. 섬나라인 영국에서 육군을 만들 필요 자체가 별로 없다.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 둘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잉글랜드 남부는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내전은 처음에는 왕당파에게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왕당파 역시 그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양측은 엣지힐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올리버 크롬웰이 이듬해 흔히 철기병으로 알려진 신모범군을 조직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결국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대세가 기울자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으나 찰스 1세를 싫어하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팔아버린다. 탄핵되어 투옥되어 있던 윌리엄 로드는 찰스 1세가 사면하려고 여러 노력을 했다. 그러나 국회가 끝끝내 거부하고 1644년 그를 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해 1645년 목이 잘리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결국 1646년 4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항복하면서 내전이 잠시 종식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를 싫어한터라 크롬웰에게 40만 파운드의 돈을 받고 추방시킨다. 추방당해서 의회측에게 모든 권력을 잃고 감금당한 찰스 1세는 이후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계속 외부와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그는 감금된 궁전에서 탈출한다. 의회의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게 되자 왕당파가 찰스 1세의 주도 하에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당파는 1년여 만에 프레스턴 전투의 패배로 또다시 진압당했다. 이에 찰스 1세는 다시 포로가 된다. 크롬웰은 더 이상 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회에게 찰스 1세의 처형을 건의했으나 반역자로 몰리기 싫었던 의회는 크롬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크롬웰은 164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의원들을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확실한 지지자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백 삼십 오명을 가려 의회를 편성했다. 그 중 칠십여 명이 출석한 이 의회를 잔부 의회라 하며,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잔부 의회는 글자 그대로, 크롬웰 파의 찌꺼기의회란 뜻이다. 왕은 반역자에게 재판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크롬웰이 장악한 법원도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사형을 판결했다. 그나마 의회 인준이라는 형식적인 절차가 남아있었지만 왕의 사형에 반대한 의원들이 일찌감치 감금되었다. 나머지 의원들은 크롬웰의 추종자들이었기 때문에 크롬웰 자신의 찬성표를 포함한 고작 59표의 찬성에 의해 찰스 1세한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나마 왕이었다는 이유로 죄수처럼 끌려나가지 않고 스스로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것만은 허락되었다. 찰스 1세는 판결을 받기 전에 최후변론에서 "기억하시오. 짐은 당신들의 국왕, 합법적인 왕입니다. 당신들이 짐에게 어떤 죄를 덧씌웠는지 기억하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처형되는 날 아침 자식들에게도 이 아비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찰스 1세의 차녀 엘리자베스는 찰스 1세가 처형당하기 전날인 1649년 1월 29일, 올리버 크롬웰의 허가로 남동생 헨리 왕자와 함께 찰스 1세를 면회할 수 있었다. 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는 그의 신하와 백성들 앞에 사형수로 섰다. 사형대는 잉글랜드 왕실과 귀족들의 연회장인 화이트홀의 뱅퀴팅 하우스 앞에 차려졌고 군인들이 그를 그 곳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자신 역시 그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자유를 갈망했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 수 없음을 말했다. 연설을 마친 찰스 1세는 집행자의 지시에 따라 사형대에 엎드렸으며 성직자가 사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 뒤 참수되었다. 찰스 1세의 목은 도끼질 한번에 깨끗이 잘렸다. 집행자는 잘린 머리를 대중들 앞에 높이 들어 처형사실을 알렸다. 처형 당시 매우 인상깊은 유언을 남겼다고 하나 실제 찰스 1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짐은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아직 단두대가 발명되기 전이라 목을 집행자가 도끼로 직접 잘랐는데, 당시 집행자의 도끼질이 능숙하지 못했거나 도끼날이 날카롭지 못했을 경우 수번을 내려쳐 사형수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저 세상에 가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 의미에서 찰스 1세는 운이 좋았다. 실제로 찰스 1세의 할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는 네번의 도끼질 만에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았다. 이후 당분간 잉글랜드는 왕이 없는 국가, 즉 잉글랜드 연방이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연방은 무늬만 공화국이지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해버리고 독재자가 되어 거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휘둘렀다. 압제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통치를 아들에게 세습하여 실제적으로 의회의 권한외엔 왕정과 차이는 없었다. 한편 찰스 1세의 왕비인 앙리에트 마리는 내전이 진행 중일 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자식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한 후,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인 프랑스로 돌아가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때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 들어갔던 딸 앙리에타는 나중에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으나 요절하고 만다. 어머니 앙리에트 마리의 오빠가 루이 13세니 둘은 사촌이다. 어쨋거나 찰스 1세의 왕비인 앙리에트 마리는 근현대사 유럽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형된 여러 군주들의 배우자들 중에 사형당하지 않고 제 명에 세상을 떠난 케이스다. 남편이 처형당한 후에도 20년을 더 살았으며 큰아들 찰스가 왕정복고를 이루는 것까지 생전에 지켜보았다. 현존하는 찰스 1세의 후손은 모두 앙리에타 앤의 딸 안 마리의 후손들이다. 이 후 찰스1세의 처형을 주도한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 ‘호국경’으로 불렸다.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포하여 당시 최강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해상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크롬웰의 사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영국을 왕정으로 다시 되돌리고 그에 의해 크롬웰은 무덤에서 다시 꺼내어져 부관참시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임 국왕 제임스 2세가 의회에 맞서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인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에는 영국 왕가의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 윌리엄 3세가 영국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윌리엄 3세는 권리장전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왕은 존재하되 군림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전통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찰스 1세의 처형은 영국 절대왕정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른 유럽 절대왕정 국가에 큰 교훈을 남겼다. 민의를 무시할 경우 국왕의 목숨조차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이는 144년 후 프랑스에서 다시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