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23.04.09 내부 간격(디모데후서 2:8-9)
내부 간격 2023년 4월 9일 본문: 디모데후서 2:8-9 (2: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2: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께서 그냥 쉽게 “날 믿고 나 있는 곳에 오라”하시면 될터인데 ‘죽고 다시 살아나실 분’을 따로 보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아무나 ‘씨=후손’이 되게 하셔도 되는데 유독 ‘다윗의 씨’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보십니다 베드로전서 3:20에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겨우 여덟 명’이다는 말씀은 실은 모든 인간은 다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건짐받은 자가 있다는 것 자체서 신기해해야 하고 의아해할 일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식으로 구원을 해내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씨’라는 말은 ‘다윗’+‘씨’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다윗의 혈통이 메시야라는 말이 아니라 다윗조차도 하나님께서 두신 ‘그 분의 씨’계열에 속한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사무엘하 7:14에 나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죽어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시고, 그 아버지됨과 유일하게 관계 있는 아들을 통해서만 구원을 실시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노아 때, 살아남은 여덟 명도 오직 방주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과 같습니다 아들만 오신다는 것은 노아 때도 아니요 아브라함 때도 아니요 모세 때도 아닙니다 오직 다윗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씨’입니다 인간의 혈통과 ‘씨’라는 것도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약속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일에서 인간을 배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배제하시는 방식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환경은 ‘선악을 아는 지식’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두려움에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이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식’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즉 보다 깊은 많은 지식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자신의 행복상태를 인간은 ‘선’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불행한 것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지식 탐구에 몰두하고 더 많은 정도를 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인간을 사냥하십니다 왜 인간들이 죽어 마땅하며 구원될 수 없어야 하고 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말아야 될 존재인가를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 알리는 방식은 전쟁이었습니다 구약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변 나라와 전쟁을 벌리게 했습니다 주변 나라는 이스라엘보다 숫자도 많고 더 강력한 군사 체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소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으로 버티는 민족들이었습니다 신약의 전쟁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전쟁을 버리는 겁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야기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자신이 죽을 이유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말씀이 좋아 돈이 좋아?” 돈 많은 것은 착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알았던 그 청년은 근심하고 주님 곁에 떠났습니다 신약 때,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무기는 십자가에서 토해져 나온 말씀입니다 즉 ‘이미 다 이룬 상태’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 어떤 식으로 말씀을 해석해도 다 이루었음을 말해주는 그런 말씀이 하나님쪽의 무기입니다 이런 무기를 장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마치 비늘과 같은 기능을 보여줍니다 물고기가 ‘비늘’이 있다는 말은 일단 물 속에서 산다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물 속에 있으면서 도 물이 몸까지 스며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풀이하면 이러합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그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가서는 아니된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은 이미 하나님 품으로 하나가 되는데 성공하심”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님의 몸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비늘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구원되어야만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티켓’을 주십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쥐고 있는 타켓은 자신이 죽어도 자신이 천국에 필히 가야 한다는 티켓입니다 즉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 채로 부활을 노리는 티켓으로서 이는 악마가 인간들을 그런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많은 지식을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마치 옛날 사진관에 있는 증명사진 촬영용 카메라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렌즈만 바라보게 합니다 하지만 옆으로 보면 렌즈 있는 곳에 상이 맺히는 곳 사이에는 주름진 검은 천으로 막혀 있습니다 간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간격을 믿게 하십니다 두 분 사이에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음을 압니다 구원이란 이미 완료되었기에 비로소 움직이는 겁니다 이런 작용으로서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자기의 주인공이 아님을 압니다 자신은 전이나 후로서 종에 불과함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간섭하여 최후의 결과를 만들어내시고 그 만들어진 결과를 위해 모든 인간의 과거가 하나님의 구원성공 사례로서 뒤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은 그 어떤 인간에게 구애받음이 없이 스스로 성취하십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나의 역사가 말씀으로 쪼개져 그저 주님의 일으키시는 그 사건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