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上-4-1)「孟子(맹자)」  滕文公(등문공上)편 4장(1)

(3-上-4-1)「孟子(맹자)」 滕文公(등문공上)편 4장(1)

有爲神農之言者許行이 自楚之滕하여 踵門而告文公曰遠方之人이 聞君의 行仁政하고 願受一廛而爲氓하노이다 文公이 與之處하시니 其徒數十人이 皆衣褐하고 捆屨織席하여 以爲食하더라陳良之徒陳相이 與其弟辛으로 負耒耜而自宋之滕하여 曰聞君의 行聖人之政하니 是亦聖人也시니 願爲聖人氓하노이다 陳相이 見許行而大悅하여 盡棄其學而學焉이러니 陳相이 見孟子하여 道許行之言曰滕君則誠賢君也어니와 雖然이나 未聞道也로다 賢者는 與民並耕而食하며 饔飧而治하나니 今也에 滕有倉廩府庫하니 則是厲民而以自養也니 惡得賢이리오孟子 曰許子는 必種粟而後에 食乎아 曰然하다 許子는 必織布而後에 衣乎아 曰否라 許子는 衣褐이니라 許子는 冠乎아 曰冠이니라 曰奚冠고 曰冠素니라 曰自織之與아 曰否라 以粟易之니라曰許子는 奚爲不自織고 曰害於耕이니라 曰許子는 以釜甑㸑하며 以鐵耕乎아 曰然하다 自爲之與아 曰否라 以粟易之니라以粟易械器者 不爲厲陶冶니 陶冶 亦以其械器易粟者 豈爲厲農夫哉리오 且許子는 何不爲陶冶하여 舍皆取諸其宮中而用之하고 何爲紛紛然與百工交易고 何許子之不憚煩고曰百工之事는 固不可耕且爲也니라 ----------------------------------------- 踵 발꿈치 종, 이를 종 捆 두드릴 곤, 삼을 곤 屨 신 구 饔 아침밥 옹 飱 저녁밥 손 倉廩(창름) 곡식창고 府庫(부고) 문서나 재물을 넣어두는 창고 釜 가마솥 부 甑 시루 증 爨 불 땔 찬, 밥 지을 찬 冶 풀무질 야, 대장장이 야 舍 ‘그칠 사’, 陶冶舍로 붙여 陶冶處 곧 ‘집 사’로 해석해도 통한다 * 神農 : 炎帝神農氏로 농기구를 만들어 수확량의 증산을 가져왔으며, 그 잉여농산물로 물물교역을 할 수 있도록 최초로 시장을 열게 한 삼황오제 중의 하나이다 이를 『주역』계사하전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무를 깎아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구부려 쟁기를 만들어서 밭 갈고 김매는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가르치니 대개 저 익괘에서 취하였고, 한낮에 저자를 열어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며 천하의 재물을 모아서 교역하고 물러가 각각 그 곳을 얻게 했으니, 대개 저 서합괘에서 취했다(斵木爲耜하고 揉木爲耒하여 耒耨之利로 以敎天下하니 蓋取諸益하고 日中爲市하여 致天下之民하며 聚天下之貨하여 交易而退하여 各得其所케하니 蓋取諸噬嗑이라) ” * 許行 : 農家의 무리로 『漢書』 藝文志에 따르면, “농가류들은 대개 농업을 다스리는 관리들에게서 나왔는데, 백곡을 파종하고 밭 갈고 누에를 쳐서 입고 먹는 것을 해결했다 『서경』 주서 홍범편에서 八政의 첫 번째를 食이라 했고, 두 번째는 貨라고 했으며, 공자는 소중한 것은 백성들의 먹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을 그 장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비루한 자들이 이를 위하였고 성왕을 섬길 바가 없다고 하면서 君臣으로 하여금 함께 밭 갈게 하여 상하의 질서를 어지럽혔다(農家者流는 蓋出於農稷之官하니 播百穀하고 勸耕桑하여 以足衣食이라 故로 八政에 一曰食이오 二曰貨라하고 孔子曰所重民食이라하시니 此其所長也라 及鄙者爲之하고 以爲無所事聖王하여 欲使君臣並耕하여 誖上下之序라) ”고 했다 정자(程子)는 “허행이 이른바 신농이라 말한 것은 후세에 상고의 일을 일컬어 서술한 것으로 그 의리를 잃은 것이니, 음양의 이치를 갖고 병을 고치는 사람들이 황제를 일컬어 말하는 것과 같다(許行所謂神農之言은 乃後世에 稱述上古之事로 失其義理者耳니 猶陰陽醫方을 稱黃帝之說也라)”고 했다 * 陳良 : 楚나라의 儒者 ------------------------------------------------------------------------- 맹자의 권유에 따라 등문공이 정전법을 시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편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농가의 무리들이 등문공에게 모여들었다 당대 농가류를 대표하는 허행은 진정으로 어진 정치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설득한 듯하다 등문공은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군주가 농가의 무리들과 함께 농사짓는다는 소문이 퍼져가자 이번에는 유가의 일부 무리들까지 합류했다 그러면서 맹자를 비난했다 남들은 군주와 함께 열심히 밭 갈면서 사는데 맹자는 땀 흘리는 일없이 유세나 하며 곳간이나 축내는 모리배(謀利輩)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한 무리중의 하나인 진상(陳相)이 맹자를 찾아와 자못 훈계하였다 농가류들은 오늘날로 말한다면 共産共食主義者라고 볼 수 있다 신농씨가 농기구를 만들어 천하를 교화하고 잉여농산물을 기반으로 교역(交易)의 이로움을 폈음에도 농가류들은 한쪽만 들어 군신이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하니, 맹자는 간략히 여덟 가지 조목을 들어서 반론하였다 그러자 진상이 백공의 일과 농부의 일은 병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