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추적 –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의 수수께끼 / KBS 2009.3.21 방송

KBS 역사추적 –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의 수수께끼 / KBS 2009.3.21 방송

남한산성에서 1,300년 전의 초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국내 어디서도 보고된 적이 없는 초대형 기와로 한 장의 길이가 무려 63cm, 그 무게만 20kg에 달한다 통일신라인들은 무슨 이유로 이처럼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든 것일까? 그리고 이런 초대형 기와를 올린 건물은 대체 어떤 건물일까? - 발굴된 초대형 기와는 수퍼 기와? 초대형 기와가 발견된 곳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이 피신했던 남한산성의 행궁 터 앞마당 수습된 기와는 토지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깨지지 않은 완형으로 발굴돼 보존처리를 마친 초대형 기와만 350여점에 달한다 보통 40cm 이상의 기와는 특대형으로 분류하는데 대부분이 50cm를 훌쩍 넘는다 길이도 두께도 조선시대 기와의 두 배 크고 두꺼운 만큼 무게도 국내 최고였다 1,300년 전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이처럼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든 것일까? 초대형 기와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기와를 복원하여 압력과 인장 실험을 해보았다 강도는 552kg 70kg의 성인 8명이 올라가도 끄떡없다 그 뿐 아니라 격파시범단의 격파에도 전혀 깨지지 않았으며 2000cc 중형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버텨냈다 - 초대형 기와 건물의 존재, ‘판축형 벽체’ 과연 초대형 기와의 무게를 지탱할만한 건물이 존재했을까? 건물 내부 초석을 따라 조성한 흙벽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2m에 이르는 두꺼운 흙벽은 단순한 흙벽이 아니라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해충을 방지하는 목탄을 올린 다음, 흙을 다져 층층이 쌓아올린 판축공법으로 만든 벽체이다 판축형 벽체는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하중을 안전하게 지반으로 전달 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초대형 기와지붕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출토된 ‘天主’명 기와는 무엇을 뜻하나? 발굴한 명문 기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명문이 ‘말촌주’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적이 없는 ‘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 개의 명문기와에 주목했다 ‘천주’라는 용어는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 집필한 이후부터 동양에서 카톨릭의 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뿌리 내렸다 기와의 ‘천주’라는 글자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일까?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건물은 1,300년 전의 종교시설이었던 것일까? - 초대형 기와건물은 문무왕 때 무기고였다 성곽복원공사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입수시설의 지하 4m 위치에서 또 다른 석성의 흔적이 발견됐다 석성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다 또 건물지에서 마산정이라는 명문기와가 발굴됐다 초대형 기와 건물은 견고한 구조로 적이 지붕을 뚫지 못하도록 설계됐고 신라의 중요한 지방 군사조직을 가리키는 ‘정’이 들어간 명문기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주장성의 핵심시설인 무기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주장성은 당군 남진 저지 위한 한강방어 총사령부 초대형 무기고를 만든 것은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이다 그런데 왜 최전방도 아닌 한강 유역에 거대한 성을 쌓았던 것일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군은 신라를 향해 남진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당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 이남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주장성은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국력을 집결시켰던 한강방어 총사령부였다 따라서 나당전쟁 기간 신라의 군수물자는 주장성으로 집결했고 초대형 기와건물에 보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초대형 기와는 당나라 20만 대군과 맞서야 했던 신라의 국운을 건 역사가 담겨 있었다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는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1,300년 전 이 땅의 기술자들은 거대한 성을 쌓고 초대형 기와를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추적 15회 –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의 수수께끼 (2009 3 21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