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가 안되는 109편..... 시인의 속마음은? 시편109편 4절 오디오가 고르지 못한점 양해바랍니다. 빨리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 꼭 새 묵 278 [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30대는 30키로 40대는 40키로 50대는 50키로 60대는 70대는 80대는 ? 갈수록 인생이 흘러가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던가? 아직 50키로 이상 달려가보지 않아서 내 나이 위에 인생의 연수가 얼마나 잘가는지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내가 경험함 만큼만 느껴지고 알아지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경험되어진 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지식으로 쌓이기도 하고 인생의 오류를 돌아보게도 한다 이처럼 일상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이 더 많이 경험되어진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뚜렷히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분명하게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내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정말 하루 하루가 매일 기적의 삶을 경험하게 하신다 감히 내가 누릴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내가 누릴수 있는 특혜가 아닌데 말이다 한동안 LH직원이 개발예정 지역의 땅을 매입한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고 지금도 이 일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정보를 이용하여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기에 논란의 중심에 계속하여 서고 있는 것이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적어도 공기업의 직원이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어떤 묵언의 기준이 있다 목사는 목사의 어떤 기준 교인은 교인의 어떤 기준이란게 있다 적어도 목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이란게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그런 사회적 기준이 라는게 있는 법이다 그런데 신앙이 변질되면 사회적 기준은 무시되고 그것은 전부 사탄이 되고 오직 자기가 하는 일 만을 정당화 시키는 그런 독불장군 안하무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보이고 주님이 보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야 하는데 우리 믿음이 세속화되면 오직 자신만 보이고 또 그런 자신의 삶만이 정당화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부인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보이는 그 기준에서 타인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 시각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자기 자신은 부인되어져야 한다 오늘 교회가 시끄럽고 산으로 가는 것은 그 밑바탕에 자기부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알고보면 주님이 열어주신 특혜아닌가? 우리는 LH직원들처럼 성령님을 이용하여 고급정보인 하늘의 정보를 빼내어 내 재산을 불릴려고 하지는 않는가? 여기에 초막셋을 지을려고는 하지는 않는가 말이다 적어도 세상이 보이는 기준은 그게 아닌데 하나님의 특혜는 받았으면서도 주님을 섬기는 예배와 삶은 특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오늘도 서두가 길어진다 이 말은 아직도 구도자의 한 사람으로 부족함이 그만큼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외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긴 하나 내면에 쌓여있는 문제는 한 둘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게 주옥같은 시편을 쓴 사람이지만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되는 스타일의 시를 쓰고 있음이 보인다 바로 시편 109편이다 5절부터 20절 까지 온통 내용이 원수갚아 달라는 간청밖에 없다 이거 왠지 다윗 스럽지가 않은 시편이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다 충신 우리야가 죽어서 눈이라도 제대로 감았을까? 싶다 전장에 나가 수고 하는 자신을 속이고 그것도 신하의 아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은 그 왕의 속내를 알았다면 오늘 이 109편은 다윗이 아닌 우리야가 썻음이 더 마땅해 보인다 어쨋던 109편은 쉽게 납득이 안가는 시편이기도 하고 저주의 기도이기도 하다 7절에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절에 연수를 짧게 하시며 직분이 빼앗기게 하시며 9절에 자녀는 고아가 되고 아내는 과부가 되며 11절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한절 한절이 저주가 섞인 기도로 보인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지 난감하다 왜 다윗이 이런 형식의 시편을 쓰고 있는 것일까? 묵상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본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의 가삿말처럼 약한 표현이 아니다 지금은 하지도 듣지도 않는 말이지만 어릴적에는 자주 들을수 있는 욕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야이 쌔가 만발이 빠져 뒤질노마” 마치 이런 식의 시라는 것이다 우리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의 저자가 쌔가 만발이 빠져 뒤질 사람이 맞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한대로 보신다면 우리 모두는 쌔가 만발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 그럼에도 목들고 사는 것은 주님의 용서, 죄사함의 은총 때문이다 오늘 다윗이 109편을 쓴 것은 이렇게 해석해야 함이 마땅할 것 같다 다윗은 지금 저주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식의 표현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의 이러한 저주를 기도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 109편을 해석하는 방식이 이러해야 할 것 같다 사람에게 한을 풀어놓는 것은 지혜로움이 못된다 유익도 없다 사람을 향한 저주는 또 저주를 낳는 악순환만 반복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것을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마음속이 미움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야 내가 인간적으로 행할 수 있는 또 다른 폭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마음에 저주를 품고 한을 품고 살면 그 미움이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폭발될 가능성이 언제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스려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화약창고와 같은 것이다 언제 터져도 터지도 마는 폭발의 위험이 항상 산재해 있는 것이다 시인은 사람에게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자기의 무고를 하나님앞에 지금 아뢰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앞에 자신의 중심을 털어 놓는 사람은 어떤 극한 상황가운데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행위에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앞에 자신의 중심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정립된 사람만이 하나님앞에 자신의 상황, 그리고 중심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은 더 이상 저주의 기도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원수 갚는 방식이 저주의 방식이 아닌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하늘의 방식을 따르기 위한 처절함 몸부림으로 보인다 오늘 믿음의 사람이 무고를 당했을 때 취해야 할 방법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할 말, 안 할 말 다하지는 말자 성경의 기준으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앞에 순종하는 것을 전제하에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하심이 오늘도 경험 되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