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남월열전 / 남월이 망하게 된 이유? / 외세 의존의 위험성
인문학 TV 고경 사마천 사기 열전 남월열전 이야기 남월에 대한 개괄 남월열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월나라(월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월(越)은 춘추시대 때 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에서 보듯이 월나라 구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뒤로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장강을 중심으로 대국이 된 초나라에 흡수되고 말지요 그리고 진나라 진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하자 중국에 완전히 귀속된 지역입니다 월(越)은 지금의 중국 동남부 절강(浙江)·복건(福建)·강서(江西)·광동(廣東省)에서 베트남 북부와 계림성까지 이르는 지역의 옛 이름입니다 당시에는 어월(於越)·민월(閩越)·양월(楊越)·남월(南越)·낙월(駱越)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집단적 명칭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진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까지 월지역은 남월과 동월로 구분되는데 이번 시간에는 남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월열전(南越列傳)에서 소개되는 남월은 통일 진나라 지방 관리인 조타(趙佗)라는 사람이 통일 진나라 말기 혼란 시기에 남월을 건국하여 4대를 계승해 이어 오다가 한나라 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다시 한나라에 통합된 나라입니다 원래 남월 지역은 진시황제 때 이미 중국에 귀속된 지역입니다 진시황 13년 진나라는 조타(趙佗)를 남해군 용천의 관리로 임명합니다 조타는 진나라 말기 혼란기에 용천 현령(龍川縣令)으로 있다가 남해 군위가 됩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직위와 이름을 섞어 조타를 위타(尉佗)라고도 명명하고 있습니다 남해군의 군위가 된 조타는 남해군 지역을 먼저 장악하고 진나라가 멸망하자 이웃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의 두 개 군을 합쳐 남월국(南越國)을 창건하고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합니다 그래서 남월(南越)의 초대 왕은 조타(趙佗)가 됩니다 이후로 조타는 한나라 고제 유방, 여태후, 문제, 경제, 무제 초기까지 남월의 왕으로 한나라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137년에 조타가 죽자, 그의 손자 조호(趙胡)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남월에 대한 한나라의 압박이 점차 강화되었으며, 조호가 죽고 아들 조영제(趙嬰齊)가 뒤를 이었으며, 다시 그 아들 조흥(趙興)이 왕위에 오르자 내란이 일어나 남월의 재상 여가(呂嘉)가 권력을 장악하고 한나라에 편에선 남월왕 조흥과 왕의 모친(王母) 규씨를 살해하고, 한나라 사신까지도 죽인 뒤 조흥의 이복형 조건덕(趙建德)을 옹립하며 한나라에 대항하였습니다 그러자 한나라 무제(武帝)는 남월 토벌을 결심하고, 복파장군(伏波將軍) 노박덕(路博德)과 누선 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지휘관으로 삼아 대군을 급파하여 남월을 공략하였습니다 결국 기원전 111년 한나라 군대는 남월의 수도(번우:지금의 중국 제3의 도시 광저우)를 함락하자 93년 간 존재한 남월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 목차 -- 1 남월국의 탄생 배경 (조타가 남월을 세우고 장기 집권할 수 있던 이유는? 시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외교력) - 남월국과 새로선 한나라 제국과의 관계 한나라 고조 유방과 관계 여태후 집권 때 관계 한 문제 때 관계 2 한무제와 남월국 관계 (사대주의에 빠져 외세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망국의 지름길) - 조호와 한나라와의 관계 (한나라에 의지하여 훗날 남월이 망하게 되는 단초를 만들다 ) - 趙嬰齊(조영제)와 한나라와의 관계 (황제인을 숨기고 한나라 부인을 맞이하다 ) - 趙興(조흥)과 한나라 관계 (어린 조흥이 왕에 오르자 어미가 친정을 하며 한나라에 기대다 ) - 바람난 치부를 감추기 위해 한나라에 기대려는 왕태후와 남월 승상 여가의 갈등 3 한무제의 결단과 남월의 멸망 - 참고 인내하다 결국 반란을 도모한 남월 승상 여가 4 사마천의 평가 #사마천 #남월열전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