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시절 113 이등병시절을 보내면서 (제2사단, 노도부대, 교육사단, 32연대, 스키대대, 양구, 구암리, 군대이야기, )
이등병시절 113 이등병시절을 보내면서 이제 내 군생활이라는 긴 여정 중 가장 힘들고 고단한 하나의 관문을 통과합니다 아니 앞으로 더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 남아있겠지만 이등병시절은 그 모든 여정의 시작점이기에 나의 뇌리에 더 뚜렷하게 각인된 시간들이었습니다 군 생활 중 거쳐야 할 가장 크고 험난한 관문을 이제 통과하면서 지난날을 돌이켜 봅니다 어떤 거부하지 못할 큰 힘에 이끌리어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땅, 양구라는 첩첩 산골에 들어왔을 때는 그 옛날 귀양살이하는 벼슬아치의 심정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내 인생의 유배지 같았습니다 과연 내가 이 땅, 이 하늘 아래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서서 살 수 있을 것인지 두려움과 함께 체념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 작은 한 페이지에 불과한 4개월여의 이등병 시간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시간은 내 전 생애를 통해 가장 크고 중요한 시간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 소양호! 그 푸른 물결을 헤치고 내려섰던 낯 설은 땅 산마다 골마다 흰 눈꽃이 피어있고 나뭇가지마다 서리꽃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러 오던 그 날! 나는 인간으로써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직 군인이라는 또 다른 존재로써 거역하지 못할 힘에 의해 세워졌다는 자각 속에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이제 녹음이 짙어진 오월의 산하를 바라보는 이 날까지 4개월 하고도 10여일 별로 오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러나 나는 완숙한 군인으로써 갖춰야 할 모든 것들을 배웠고 체험을 통해 익혀 왔습니다 책임이라는 사슬과 의무라는 무거운 중압감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답답한 시간들이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나는 내게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몇 대의 매나 기합이나 욕설이 비록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 주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영원한 고통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지켜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마음과 정신력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작아지지 않기 위하여, 아니 더 크고 높은 이상의 날개를 펴기 위하여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자 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처럼 비록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고 무게가 있을지라도 마음의 영역을 넉넉히 넓히며 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길이요 언젠가는 끝나게 될 이 길을 후회 없이 마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등병 시절을 보내는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앞날을 위한 전진의 순간이요, 또 하나의 결단의 시간이기를 바랄뿐입니다 오늘은 하나의 끝도 아니요 반환점도 아니요 휴식시간도 아닙니다 오직 전진하는 삶 속에서의 한 점일 뿐입니다 그래도 나는 이 작은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끝없는 행군 중에 잠시 느끼는 마음의 여유일지라도 이 날은 내게 있어 뜻 깊은 날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육군 이등병 시절! 이제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을 시절이기에 지나간 날의 고통보다는 아쉬운 마음과 함께 스스로 대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는 내 앞에 몰려 왔던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이기고 정복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며 이 소중한 경험은 앞으로의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내게 힘을 주시고 이기도록 해주신 하나님과 부모 형제,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1981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