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인내, 역사를 만든 인물, 한무제시절 이릉을 변호하다 억울하게 궁형을 당한 사마천과 그를 비난했던 이광리 흉노땅에서 죽어간 이릉, 교훈을 주는 이야기

사마천, 인내, 역사를 만든 인물, 한무제시절 이릉을 변호하다 억울하게 궁형을 당한 사마천과 그를 비난했던 이광리 흉노땅에서 죽어간 이릉, 교훈을 주는 이야기

사마천과 이릉, 이광리 사마천은 한나라 무제시기에 활동한 역사가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용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사마담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태사령의 직책에 있었다 사마담은 죽으며 아들 사마천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어 수많은 책들을 섭렵하고 수많은 사료를 수집정리하여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를 집필하는 도중 사마천은 보병 5천명으로 흉노기병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여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릉은 비장군이라고 불렸던 이광이라는 장수의 손자로서 이릉은 50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당시 흉노를 공격하던 이사장군 이광리의 별동대로서 흉노땅 깊숙이 준계산까지 나아갔다 그곳에서 흉노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마침 흉노의 저제후선우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흉노의 전력은 기병 3만이었는데 이릉의 반격에 놀란 흉노선우는 주변의 모든 전력을 소환했고 결국 8만의 흉노기병에 의해 이릉은 공격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8일간에 걸쳐 하루에 수십차례 전투를 치루면서 후퇴하여 1만여명의 흉노군을 죽였으나 결국 화살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항복하게 된다 이는 기원전 99년 5월에 있었던 사건인데 당시 조정에서는 이릉의 항복을 두고 한무제의 분노에 편승하여 다들 이릉과 그의 가족들에게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마천만이 이릉을 변호하였다 그러자 한무제는 사마천이 이광리를 깍아내리고 이릉을 변호한다고 생각하여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렸다 이광리는 당시 한무제가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로서 이광리는 사마천이 이릉과 같은 무리라고 비난하였다 결국 사마천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서는 돈 50만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거나 사형을 당하거나, 궁형을 받는 선택을 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당시 50만전은 병력 5000명을 1년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으로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라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스스로 궁형을 자처하였다 이후 기원전 97년 한무제는 이광리에게 13만의 병력으로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10여일간의 대치후에 전투는 종료되었다 그때 한무제는 공손오라는 인물에게 이릉을 흉노에서 데려오도록 하였는데 공손오는 흉노땅에서 이릉이 흉노군사들에게 병법을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한무제에게 보고하였고 한무제는 분노하여 이릉의 노모와 집안 식구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는 이서란 인물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친 것을 이릉으로 잘못알고 벌어진 사건으로 이릉은 한나라에서의 일가를 모두 잃고 결국 흉노에서 선우의 사위가 되어 정착하게 되고 기원전 74년에 흉노땅에서 죽게 된다 한편 바른말을 하는 사마천을 비난하여 사지에 몰아넣고 특출한 장수의 자질도 없으면서 한무제의 편애를 받으며 대군을 이끌다 연연산 전투 등에서 많은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흉노에게 항복한 이사장군 이광리가 결국에는 일가가 멸족되고 자신도 결국 흉노에 의하여 산채로 인신공양된 것은 사필귀정일지도 모른다 한편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최악의 치욕을 견디며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다 사마천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있던 친구 임안에게 쓴 보임안서라는 글에서 “죽음은 단 한번이지만 어느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느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라고 말하였다 사마천의 경우 자신과 특별한 친분도 없던 이릉이라는 인물을 변호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결국 치욕적인 궁형을 받는다 바른 말을 하고도 억울한 일을 당한 사마천의 한은 사기속에도 녹아 있다 허울뿐인 명분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그의 역사정신이 담긴 사기는 참으로 많은 교훈을 후세에 전해주며, 사마천의 사기에서 우리는 죽음보다 무거운 사마천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사마천#인내#사기#교훈을주는이야기#인과응보#한무제#이릉#이광리#이사장군#연연산전투#임안#사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