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시감상] 2025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동아일보 장희수의 사력, 경행신문 안수현의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현대경제신문 엄경순의 파밭

[당선시감상] 2025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동아일보 장희수의 사력, 경행신문 안수현의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현대경제신문 엄경순의 파밭

사력 / 장희수 ​2025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 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 쓰라던 목소리가, 컷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 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정갈하고 하얗게 펼쳐지는 꽃밭처럼, 무언가 떠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할머니가 있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 ​​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2025 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 ​ 파밭 / 엄경순 ​2025년 현대경제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던가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푸른 속내를 감추며 더욱 단단해져가고 꽃씨는 벌써부터 파 밭 파 밭 아우성인데 나는 생각이 여무는 그 침묵이 좋아라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