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채널뉴스] '믿음과 절개의 삶', 손양원 목사

[C채널뉴스] '믿음과 절개의 삶', 손양원 목사

고 손양원 목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리민족의 비극적 역사 한 복판에서 순결한 믿음과 굳은 절개를 지킨 위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을 소개합니다 계속해서 양화수 기자의 보도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민족에 어두운 그늘이 드려지던 지난 1902년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의 한 독실한 믿음의 가정에서 출생합니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던 그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칠원보통학교 시절 일본 천황에게 절하는 '궁성요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합니다 1938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목회에 길에 접어든 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이 1000여 명 이상 요양하던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손 목사는 한센병 환자였던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나환자들의 상처에서 나오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치료했던 예화는 교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러던 중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와 부흥회로 다녔던 여러 지역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회 내에 일장기를 부착하지 못하도록 설교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탄압을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일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외친 손 목사 일제는 그를 5년 동안 감옥에 가두고 모진 핍박과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국토가 남북으로 나뉘고 우리민족이 치열한 이념갈등에 사로잡혔던 그 때, 여수에서 일부 좌익세력과 정부군이 충돌한 '여순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학생이던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좌익 청년단체에 끌려가 순교를 당합니다 애양원에서 치러진 두 아들의 장례예배에서 손 목사는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그를 양자로 삼겠다 "는 발표를 합니다 이후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청년 안재선이 정부군에 사로잡히자 그의 구명운동을 벌여 신병을 인도받고, 마침내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일로 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여수까지 내려와 주둔해 있던 북한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으로 퇴각하면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교인들을 지키기 위해 앞장섰던 손 목사도 그들의 손에 의해 마침내 순교 당하게 됩니다 ----- BGM 깔리면서 자막으로 ---- "내가 나병에 걸리면 얼마나 좋겠나 " - 애양원 사역 중 "내가 어떻게 나 살자고 양떼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말이오" - 교장 제의를 거절하며 "기독교는 잘 살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잘 죽기 위한 종교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자신들을 위해 우세요 " - 교인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 - 손양원 목사 어록 중 -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믿음과 굳은 절개, 그리고 교인들과 한센병 환자, 심지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했던 사랑의 원자탄 고 손양원 목사 손 목사의 삶과 신앙은 우리 민족의 어두웠던 시절을 밝혔던 한줄기의 찬란한 빛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