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교수-WCC 에큐메니칼운동-교회사 특강21-성령론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다고 할 것 같으면, 20세기는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敎會聯合運動), 즉 에큐메니칼운동의 세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20세기의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은 모트(John R Mott; 1865-1955)라는 위대한 인물을 필두(筆頭)로 발전되었으며,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Edinburgh Conference, 1910)라는 최초의 선교회의를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앤더슨(Gerald H Anderson)에게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는 20세기의 선교를 7개의 층으로 구분하면서, 그 첫 번째 단계를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로 들고 있다 Gerald H Anderson(ed ), The Theology of the Christian Mission(Nashville: Abingdon Press, 1961), 5 그런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선교회의인 1910년의 에딘버러회의는 교회연합운동의 기원이며, 또 이런 점에서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에딘버러회의는 하나의 렌즈로 묘사될 수 있겠다 이 렌즈는 선교 협력을 위한 일 세기간의 모든 시도로부터 비추어진 여러 빛들을 받아 그것들을 모아서 미래를 향해 발하게 맞춘 렌즈라고 할 수 있다 David J Bosch, 「선교신학」, 전재옥 역(서울: 두란노서원, 1985), 191 결국 1910년은 에큐메니칼운동이나 선교운동을 위해서나 결정적인 해이며, 에딘버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개신교가 함께 모이게 된 초창기 연합의 시발점이요 결정인 것이다 에딘버러회의는 비록 선교단체를 위해 권위있는 입법기관의 역할은 못했을지라도, 연합한 행동의 준비를 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는 있었다 이 최초의 세계선교회의에서 던져진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즉 선교는 복종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명령(마 28:19)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자연히 선교의 전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08년에 채택된 국제위원회에서 8개의 주제가 총회의 주제목으로 선정되었다 이 주제들을 위해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후에 교회일치운동의 좋은 전례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위원회는 여러 방면의 통신교환을 통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였다 최초 위원회장인 모트(Mott)는 전세계의 600명 이상에게 개인적으로 편지하였다 이렇게 유인물과 의견을 수집하는 동안 일치운동의 분위기는 고조되었으며, ‘에큐메니칼 대화’(Ecumenical Conversations)라는 전례를 만들었다 다음은 에딘버러회의의 주제들을 다룬 것이다; ▷복음을 모든 비기독교세계에 전파한다(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선교지에서의 교회(the Church in the Mission Field) ▷각 나라의 고유한 생활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교육(Education in relation to the Christianization of National Life) ▷비기독교 종교와 관련된 선교 메시지(the Missionary Message in relation to the Non-Christian Religions) ▷선교사들의 준비(the Preparation of Missionaries) ▷선교의 본부기지(the Home Base of Missions) ▷선교와 정부(Missions and Goverments) ▷협동과 연합의 증진(Co-operation and the Promotion of Unity) 위의 주제들 가운데 세 개는 교회연합운동의 성장에 특별한 기여를 하였다 그중 첫 번째는 교회의 범세계적인 선교를 강조하였고, 두 번째는 신생교회(the Young Churches)라 불리우는 선교지 교회에 대한 선교사업의 목적인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하는 선교지 교회의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 것은 제목이나 의도에 있어서 분명한 에큐메니칼운동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의 에딘버러회의는 독창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1854년 뉴욕과 런던, 1860년의 리버풀대회, 1878년 런던, 1879년 런던, 그리고 1900년의 뉴욕대회 등으로 계승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과거의 총회들을 계승했지만, 에딘버러회의는 많은 면에 있어서 전례를 뒤업고 명백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1888년과 1900년에 있었던 초기의 2개 총회는 여러 선교기구에 의해서 대표단이 임명되었으며, 오고자하는 사람에게는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딘버러회의는 기구에서 파견된 대표단으로 그 숫자가 제한되었으며,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중인 선교단체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대표단도 선교비를 지원하는 액수의 비율에 따라 정해졌다 또한 종전과 같은 성회의 성격보다는, 이 회의는 각 교회가 대변하는 권위있는 공식기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선교단체의 총회였지 교회의 총회는 아니었다 또한 이 총회는 모든 선교단체가 초청된 것은 아니었고, 비기독세계에서 일하는 단체만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규제는 총회가 그 목적을 위해 날카롭게 촛점을 맞춘 면에서 온당한 것으로 보였다 비기독교세계에서의 선교를 목적하는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그들이 지닌 저마다의 신앙적 확신과 신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에딘버러회의의 성격은 에큐메니칼운동에 더욱 넓은 포용성을 지니게 해주었다 에딘버러회의에서 신생교회(新生敎會)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신생교회들의 잠재적인 중요성은 그들이 보낸 지도자를 훈련하는데 보여진 관심에서 잘 나타났다 한 신생교회의 지도자는 1860년 리버풀회의의 토론에 참가하여, 더 많은 나라가 성경 번역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1888년 영국에서 개최된 개신교 선교 백주년 세계대성회에서 신생교회는 거의 대표되지 못했으며, 1900년 뉴욕의 에큐메니칼 선교총회에서는 6명 정도가 발언하였고, 1907년 상하이의 중국 선교 백주년 선교총회에서는 1170명 중에서 불과 6,7명이, 그것도 방문객으로서만 신생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Ruth Rouse,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359-60 에딘버러회의에도 신생교회 대표자들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비록 17명 밖에 안되는 숫자였으며 47회의 연설 가운데 겨우 6회의 기회를 가졌지만, 이들은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큰 일을 해냈다 이들 가운데 3명은 계속되는 총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진보는 미래의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서 신생교회가 차지하게 될 위치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즉 앞으로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신생교회나 기존의 교회를 동등한 입장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1910년의 에딘버러회의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Anglo-American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신생교회가 극히 적을 뿐 아니라, 유럽대륙 출신의 대표도 역시 극소수였다 또한 로만 카톨릭과 정교회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은 카톨릭과 정교회는 이 회의에 초대 받지 못했다 Anglo-American이 주구성원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에큐메니칼운동이 아일랜드, 미국 그리고 영국 등지에 주로 영향을 주고 유럽 대륙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전세계적인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해서 다음 총회에서는 로만 카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신생교회들의 참여가 언급되었다 1910년의 에딘버러회의는 후에 에큐메니칼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훌륭한 훈련의 장소였다 그러한 인물로는 모트(John R Mott), 올드햄(Joseph H Oldham), 아자리아(V S Azariah), 브렌트(Charlse H Brent), 템플(William Temple) 등을 들 수 있다 모트는 초대 준비위원장이자 국제선교위원회의 회장으로서 모든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는 신앙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영적 인물로서,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설득력있는 연설 능력 등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감리교의 평신도로서 신학도 하지 않은 그는 모국어인 영어 밖에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국가와 종족 그리고 교회를 연결시켰으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협력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모트의 행정 비서인 스코트랜드인인 올드햄은 모트와 함께 총회의 창의적인 일들을 도왔는데, 기독학생운동과 인도의 YMCA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에딘버러총회와 그 실행에 있어서의 범세계적인 기독교 연합은 1908년부터 26년 동안 올드햄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1905년 할레신학교에서 공부한 관계로 독일인의 심성을 잘 알았고, 이를 토대로 독일 지도자들의 신임을 얻어 종전의 Anglo-American이 압도적이었던 회의 분위기에 대륙적인 힘을 가입시키는 데 큰 힘을 쏟았다 이러한 에큐메니칼운동의 발전은 서구에서보다는 신생교회에서 더욱 급속히 발전되었는데, 이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긴급한 불모지의 상황이 기존의 교파나 신앙고백의 장벽을 초월하여 연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에딘버러회의는 유럽 대륙과 영-미의 서로 다른 선교신학을 융합하지 못했으며, 신학적 열매를 거두는데 큰 성과를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에딘버러회의는 한 시대의 종말과 또 다른 시대를 탄생케 한 분수령(分水嶺)이 되어 주었다 왜냐하면 에딘버러회의가 남긴 발자욱은 앞으로 진행될 에큐메니칼운동의 발전과 조직을 위한 커다란 전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10년의 에딘버러회의는 20세기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한 새로운 예언자적 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HEM, 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