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궁중비사] 연산군 시절에 벌어진 내시들의 아랫도리 집중 조사 사건

[조선궁중비사] 연산군 시절에 벌어진 내시들의 아랫도리 집중 조사 사건

#연산군 #내시 #양물단지 #이경 #석극산 #인수대비 #김세필 #서득관 #되살이 #최수연 #책비 #김처선 #혼서 #세책 #순종 오늘 조선궁중비사는 연산군 시절에 벌어진 내시들의 아랫도리 집중 조사 사건 이야기입니다 내시들의 양물단지 흔히 내시는 죽을 때까지 궁 안에서 사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고령이 되면 진상품 관리 등의 파견명목으로 궁 밖에 나가 말년을 보냈습니다 경상북도 청도군 임당리에 있는 7동짜리 한옥이 그중 하나로 내시들의 양로원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인데 집안이 부유하거나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귀가해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궁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왕과 왕족만이 궁궐 안에서 죽을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시들은 환관이 되기 위해 잘라낸 자신의 고환을 잘 말린 후 ‘양물단지’에 보관했는데 죽은 후 고환을 다시 몸에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내시들은 자신의 고환이 담긴 양물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는데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의 초안산에 있는 분묘군에 묻힌 사람들의 상당수가 내시였습니다 일부 사극에서 조선시대 내시들은 뿔이 없는 사모를 쓰고 흉배가 없는 녹색 단령을 입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증 오류로 일반 관료들처럼 뿔이 있는 사모를 쓰고 품계에 따른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었습니다 연산군 때 갑자기 전의감 관원을 시켜 내시 이경과 석극산의 음근(陰根)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가 떨어지는데 누군가 그들의 음근이 다시 살아났다는 첩보를 왕에게 흘려서 그런 명이 나온 것입니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연산군이 승지 강징을 불러 내시들 가운데 고자가 아닌 자들이 고자 행세를 하니 의원들을 대동하고 내시들의 아랫도리를 조사해 음경이 있는 자들을 색출하라고 한 것입니다 지시를 받은 강징은 내시들 모두를 집합시킨 뒤 창덕궁 선정전 동쪽 협양문 부근에서 그들 아랫도리를 조사했는데 그 때는 1504년 3월부터 시작된 갑자사화가 휘몰아쳤을 때였습니다 그 해 4월 27일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숨을 거두면서 삽시간에 대궐은 피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스물아홉 살의 왕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