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해지는 10분 지식]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존스튜어트밀 / 영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 / 소년 밀이 받은 교육 / 패럴랙스 인문아트

[유식해지는 10분 지식]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존스튜어트밀 / 영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 / 소년 밀이 받은 교육 / 패럴랙스 인문아트

존스튜어트 밀생애 해설 존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06년 제임스 밀(James Mill)의 장남으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벤담의 제자이자 친우(親友)로서 대학교육과 종교를 불신하였지만 아들 밀의 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주입식 교육을 피하고 어떤 문제든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도록 아들을 가르쳤다 스튜어트밀은 3세부터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7세에는 이미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8세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한 밀은 많은 문학적 저작들과 역사서를 섭렵했고, 12세부터는 논리학과 경제학도 학습해 나갔다 밀의 이러한 정신적 성장과정은 분명 천재의 그것이었지만, 자만할까 두려워한 아버지의 교육으로 밀 스스로는 자신이 천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교우관계가 부족했고,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나이에 걸맞은 놀이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천재적인 학문적 역량을 선보인 밀도 20세에 이르면서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다 프랑스 여행에서 알게 된 벤담주의에 대한 반감들,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이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닌 자신의 감정 등이 원인이 된 이러한 위기는 밀이 24세가 되던 1830년까지 지속된다 물론 그동안 밀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밀은 1823년에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동인도 회사의 서기로 취직했고, 논리학과 경제학을 연구했으며, 아버지의 『웨스트민스터 평론』이나 벤담의 『증거론』 출간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네 인생의 목적이 모두 실현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 (중략) … 이것이 네게 큰 기쁨이요 행복이 되겠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밀의 위기는 “깊고 강한 감정을 가졌고, 투철하고 직관적인 지식을 가진” 테일러 부인(Harriet Taylor)을 만나면서 점차 극복된다 이후 테일러 부인과는 20년 동안 순수한 교제를 지속하다가 남편 테일러씨가 사망한 후에 결혼하게 되는데, 당시 이들의 삼각관계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화제였지만 당사자 세 사람의 이성적 행동으로 추문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밀은 행동하는 사상가였다 그는 사상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학장을로 재직 재임 하였고 같은 기간 동안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그는 하원의원으로 헌정사상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고 보통 선거권의 도입 같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더욱이 밀은 이후에 테일러 부인과 『자유론』(On Liberty)을 공저하는데, 밀 스스로 이는 자신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 남는 책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고, 또 그에 걸맞은 명성을 획득한 밀의 대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