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김시스터즈 #다방의푸른꿈 #한국최초 #블루스 #미국진출
한국최초의 블루스 곡으로 평가받는 곡 다방의 푸른 꿈(1939년) SIDE-B, 트랙1 작곡 : 김해송 작사 : 조명암 (김 시스터즈는 SIDE-B, 트랙2 / 박남포 개사, 이봉룡 작곡)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흐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흘러간 꿈은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흐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밤이 새롭다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 밤 목미어 부른다 그리운 그 밤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서리에 시든 장미화러냐 시들은 사랑 쓰러진 그 밤 그대는 가고 나혼자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 밤이 새롭다 ◎ 다방의 푸른 꿈은 한국 최초의 블루스 곡으로 꼽히는 노래로 당시 이난영은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유명인이 되었다 우리나라 가요계에서는 재즈의 시대를 연 개척자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남편이자 작곡가 김해송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 특히 김해송의 음악은 색소폰·트럼펫·트롬본 등이 두드러지는 한국 재즈의 원형이라 평가받는데 1930~40년대 언론은 김해송을 ‘재즈의 귀재’라고 지칭했다 해방 후 이난영 목포의 눈물로 가요계의 샛별이 된 이난영은 이듬해 21세의 나이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 ** 작곡가 김해송은 1930~4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천재 뮤지션’으로 통했으며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 고운봉의 선창 등을 작곡 - 이후 이난영은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 - 또한 1939년에는 오빠는 풍각쟁이의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화류춘몽의 이화자 등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 - 한국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 ◎ 멤버가 계속 고정되면서 활동한 것은 아니고 이난영과 장세정이 고정 멤버였고 여러 멤버들이 그룹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으며 정식 앨범은 하나도 내지 않았다 - 무대 의상으로 저고리를 입고 나와 당시 나라 잃은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무대 의상이 저고리여서 ‘저고리 시스터즈’라 이름을 지었다 - 광복 이후 해체 ◎ 광복 후에도 가수로 활약하였는데, 남편 김해송과 함께 KPK 악극단(김해송 악단)을 만들었다 이 악단에는 이난영, 장세정, 윤부길(가수 윤항기, 윤복희 아버지) 등 당대 스타들이 출연 한국 전쟁 후 이난영의 삶 ◎ 이난영의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되면서였다 심지어 서울 필동의 방 13칸짜리 저택까지 불에 타 없어져 삶이 곤궁해졌다 - 이난영, 김해송 부부는 7남매를 낳았는데 이난영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자신의 두 딸(김숙자·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민자)로 구성된 3인조 그룹 ‘김시스터즈’를 결성해 미 8군 무대에 세웠다 남인수와의 사랑 ◎ 당시 혼자가 된 이난영을 위로해주고 경제적인 도움까지 준 사람은 당대 최고 인기 가수 남인수였다 남인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난영은 남편이 운영하던 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가수 활동에 나선 자녀들을 지원했다 이난영은 자신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남인수의 모습에 반해서 사실혼관계로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남인수도 유부남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위 불륜관계로 낙인찍혔지만 이난영은 남인수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했다고 한다 1962년 남인수는 이난영 품에서 사망하고 이후 이난영은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한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남인수가 세상을 떠난 3년 만이었다 ◎ 이난영 대표곡 목포의 눈물 아리랑 담배집 처녀 다방의 푸른 꿈 해조곡(海鳥曲)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過去夢) 목포는 항구다 등 ◎ 김시스터즈는 악기를 13개나 자유자재로 연주했으며 미국 컨트리음악을 재해석한 놀라운 무대를 보여 미군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그렇게 미8군 무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 급기야 미국의 한 공연기획자가 찾아와 미국 진출을 제안했고 이난영은 고심 끝에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고 12년 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김시스터즈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네 번째 고액 납세자가 될 만큼 미국 진출이 성공적 -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65년, 어머니 이난영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고 ‘성공할 때까지 절대 돌아오지 말라’는 엄마의 말씀 때문에 예정돼 있던 공연을 취소할 수 없었던 자녀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 이후 1970년 김시스터즈는 어머니 이난영을 추모하는 ‘김시스터즈 가요집’을 발표했는데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등을 수록 ** 방송에 사용하는 앨범은 1975년에 발표했으며 앞에 김시스터즈의 인사말이 있음 여러분 안녕하세요 꿈에도 그리운 모국에 돌아와 여러분을 뵙게 되어 하늘을 찌를듯한 기쁨에 가득 차 있읍니다 18년전 우리들이 서울을 떠나 미국에 갈때와는 달리 오늘의 조국은 너무나 비약적으로 근대화된 아름다운 모습과 명랑하고 씩씩한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 감격과 행복감을 이루말로다 표현할 수 없읍니다 이 장한 조국의 모습을 미국에 돌아가면 언제 어디서나 태극기를 꽂아놓고 자랑하고 또 자랑하고 싶읍니다 끝으로 이번 방문에 있어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감사 드리며, 우리들의 「어머니」가 남기시고간 노래를 다시 불러 레코오드에 남기고 떠나갑니다 여러분 행복을 빌겠읍니다 안녕 ◎ 대표곡 김치깍두기 찰리브라운 참고) ◎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이 상영됐는데 이 작품은 김시스터즈에 관한 다큐멘터리로서 이난영에 의해 김시스터즈가 만들어진 배경과 연습,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을 건너가는 과정 등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