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59회 고려판 한류붐을 일으킨 기황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59회 고려판 한류붐을 일으킨 기황후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이었습니다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물(貢物)’로 끌려가는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1333년 14살의 나이로 끌려간 기씨 소녀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습니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빼앗았습니다 원나라 문헌은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버들가지 처럼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 ”고 했습니다 또 “기씨가 지극히 영민하고 총명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씨가 황제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제2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의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353년) 기황후는 마침내 대원제국의 안방마님이 됐습니다 기황후의 드라마틱한 출세기에 이어 원나라에 고려열풍이 붑니다 원나라 조정에는 고려풍의 옷, 즉 고려 패션이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고려여인들로 구성된 여악이 춤과 노래로 원나라 백성들을 매혹시켰습니다 원나라 시를 보면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언어를 배우네 어깨동무 하며 낮게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 (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卽梨)”(연하곡서·輦下曲序)라는 대목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소녀시대〉가 전세계에 K팝 열풍을 이끌 듯이… 하기야 K팝의 K가 코리아, 즉 고려 아닙니까 그러고보면 기황후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였던 셈입니다 기황후가 키운 걸그룹들이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원나라) 백성들을 매혹시켰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경기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는 심상치 않은 마을이름과 무덤이 있습니다 재궁동(齋宮洞)과 황후총(皇后塚)입니다 원나라의 멸망기에 행방이 묘연해졌던 기황후가 죽은 뒤 고향에 묻혔다는 곳입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경향신문 홈페이지 경향신문 페이스북 경향신문 트위터 스포츠경향 홈페이지 스포츠경향 페이스북 스포츠경향 트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