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 타이완까지, 인삼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인삼, 독립의 뿌리가 되다] /YTN korean

남미에서 타이완까지, 인삼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인삼, 독립의 뿌리가 되다] /YTN korean

명약이라 불렸던 한반도의 특산물 고려 인삼은 높은 위상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더했습니다 과연 생명을 살리던 약은 어떻게 나라를 살리는 약으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독립 운동이 가지를 뻗을 수 있도록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인삼! 그 숨겨진 이야기를 추적해봅니다 [해설] 1908년 3월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외교 고문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각국의 귀빈들이 묵는 페어몬트 호텔에 자리를 잡은 스티븐스는 현지 언론을 만나는데요 평소 친일 성향이었던 그는 역시나 대한제국이 아닌 일본을 옹호합니다 전에는 희망이 없던 조선인의 미래가 일본 덕에 밝아지고 있다 기사를 확인한 한인 대표들은 호텔로 찾아가 정정 보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한인 대표들의 말을 무시하고 워싱턴으로 떠나려 페리 항구로 갔는데요 그를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뷰 : 정 은 경 / 샌프란시스코 한인역사박물관 관장] "여기가 사건 장소인데요 그 당시에 미국인 외교관을 대한의 두 젊은이가 사살했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일으켰고 여기 신문에서도 사건 이후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계속 대서특필될 정도였습니다 " [해설] 페리항구 앞에서 총에 맞은 스티븐스가 수술 중 사망한 사건은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강한 처벌을 주장했는데요 저격에 실패하여 맨몸으로 달려든 전명운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스티븐스에게 두 발을 명중시켜 사망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힌 장인환만 25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독립운동가 장인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장인환의 흔적을 찾아간 곳은 상항 한국인 연합감리교회입니다 [인터뷰 : 유 고 명 / 상항 한국인 연합감리교회 역사보존위원장]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시고 우리 교회 창립 멤버이십니다 " [해설] 1900년대 초반에 세워진 이 교회는 단순히 교회의 역할만 하던 곳이 아니라 한인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인터뷰 : 유 고 명 / 상항 한국인 연합감리교회 역사보존위원장] "이 기록은 1919년경 교회 출석부입니다 장인환 선생이 오셨다는 사인이 여기 남아있습니다 " [해설] 하와이에서 이주해온 장인환은 교회에 출석하고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참여하는데요 한인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장인환, 전명운의 변호사 비용을 모금하는 등 후원활동을 펼쳤습니다 [인터뷰 : 유 고 명 / 상항 한국인 연합감리교회 역사보존위원장]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투사 이대위 선생 도합 아홉 분 정도가 모여서 첫 예배를 보셨어요 그런데 (교인 중) 인삼 상인 세 분 정도는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까 금전적으로 (교회에) 도움을 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 [해설] 장인환이 소속돼 있던 대동보국회와 안창호를 주축으로 한 공립협회, 그리고 하와이의 합성협회 등 스티븐스 저격을 계기로 흩어져 있던 재미 한인단체는 통합운동을 시작합니다 통합돼 탄생한 대한인국민회는 LA로 옮겨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약 10년가량 앞서 만들어졌는데요 북미,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만주에 지방총회를 두고 정부 역할을 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미주지역 개개인의 성금을 한 번에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독립자금 지원에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국내외 사정을 알리는 신문의 발행도 계속됩니다 당시 발행된 신한민보에는 관삼 공매와 같은 조국의 인삼 소식도 실려 있어 미주 한인의 인삼에 대한 관심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 민 병 용 / LA 한인역사박물관 관장]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돕기 위한 명목으로 (한인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냈습니다 그중 방사겸이란 분은 인삼 장사를 한 분인데 독립공채를 사서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 [해설] 조국과의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직접적인 행동 대신 독립 자금의 마련으로 기울었습니다 한인 사회의 결집을 통해 독립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습니다 인삼상인이자 독립운동가 방사겸은 장인환이 속해있던 대동보국회 발기인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지만 아시아인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미술 대신 장사를 택했다는데요 아들이 그 대신 화가로 활약 중입니다 아버지가 조국을 사랑했고 독립운동에 매진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방사겸의 아들 20대에 하와이 이민 대열에 합류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던 방사겸은 미국 본토에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고령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히 쉬는 법 없이 성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 데이브 방 / 방사겸의 아들] "저희 아버지에게 장경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장경은 한국을 지배한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조직(대동보국회)을 만든 분입니다 아버지와 장경은 독립운동 조직의 운영자금을 마련하려 인삼 판매를 했습니다 " [해설] 아버지의 유품을 소중히 보관중이라는 데이브 방 - "여기 있네요 " 방사겸은 위암 투병 중에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일상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흔적을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것입니다 - "동지회 " - "동지회에 돈을 낸 것 " - "신한민보에 돈을 낸 것 5달러 " 방사겸은 당시엔 큰 금액이던 5~10달러 가량을 여러 단체에 꾸준히 지원합니다 LA 로즈데일 묘지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는 방사겸은 이곳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 "여기 아버지, 어머니가 잠들어 계세요 " 나라를 잃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민자로 살아야 했던 서러움과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까지 고난의 세월을 버텨야 했지만 다행히 조국의 광복을 직접 보았는데요 [인터뷰 : 데이브 방 / 방사겸의 아들] "저희 아버지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인에게 (인삼을) 팔기 위해 쿠바와 자메이카의 킹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도 갔습니다 " [해설] 쿠바 등 남미까지 진출해 인삼을 판매했다는 방사겸! 고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상인의 특성은 우리 인삼이 세계 곳곳에 퍼질 수 있게 했습니다 [인터뷰 : 한 시 준 /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인삼 상인들은 여러 곳으로 다녔습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해서 제공하는 것도 인삼 상인들이 했던 역할 중 하나입니다 " [해설] 미주 최대 독립운동가 가문의 수장인 강명화도 칠레로 향합니다 강명화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고향에 있을 때 인삼 장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미국에서의 이동도 인삼 판매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 강재신 / 강명화의 증손자] "우리 조부(강명화 子 강영소)님의 5형제입니다 5형제 모두 서훈을 받았습니다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 [해설] 인삼을 팔며 전국을 돌아다녔던 강명화는 일찍 사상이 깨였다는데요 미래를 위해 아들들과 함께 하와이 이민선에 몸을 싣습니다 [인터뷰 : 강 재 신 / 강명화의 증손자] "매일 전통 의상을 입고 갓을 쓰고 큰절을 했습니다 처음 본 (한국 문화에) 미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굉장한 숫자가 모이는 구경거리가 돼서 (현지인이) 모인 현장에서 인삼을 홍보했다는 것이 우리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 [해설] 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일상에도 한국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던 강명화의 아들들은 매일 아침 한복을 입고 문안 인사를 올립니다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 인삼을 판매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방사겸이 쿠바 등지로 향하고 강명화가 칠레로 향했을 즈음 또 한 사람이 남미로 향합니다 바로 박영순입니다 박영순은 대한인국민회 초기 멤버이자 안창호와 함께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인터뷰 : 김 영 욱 / 프레즈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교수] "박영순 선생님께서는 인삼을 팔러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가 이곳(리들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중요한 부분은 이분이 멕시코에 인삼을 팔러 갔다가 에네켄 농장에 거의 노예처럼 팔려 온 한인들을 보고 굉장히 마음이 아파서 이 내용을 한국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 [해설] 멕시코의 특산물인 '에네켄'은 용설란으로 알로에처럼 생겼습니다 하지만 가시가 매우 억세고 독성이 있어 노동 환경이 매우 참혹했다는데요 박영순은 보고 들은 참상을 편지에 적어 공립협회에 보내 기사화하도록 합니다 꿈의 직장이라는 거짓 광고에 멕시코로 건너갔다가 노예로 전락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후 멕시코 이민은 금지 됐는데요 남미로 간 한 인삼 상인의 정보가 수많은 한인의 피해를 막은 것입니다 인삼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곳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 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어 1895년부터 약 50여 년간 일본 지배하에 있었던 타이완 1930년대 타이완의 한인은 주로 인삼 장사와 약 행상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인터뷰 : 김 상 호 / 타이완과학기술대학 교수] "여기가 한재룡 선생께서 무역상을 했던 그 선흥사 자리로 추정되는 자리입니다 " [해설] 기후 때문에 삼을 키울 수 없는 타이완에서 고려인삼은 고가에 판매됐습니다 한재룡이 경영하는 선흥사라는 삼 장은 헐벗고 굶주린 동포 형제의 수용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삼을 팔아 번 돈으로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한재룡 하지만 한재룡은 물론 선흥사에 대한 자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깁니다 비슷한 시기, 타이완에는 또 하나의 인삼 회사가 운영 중이었습니다 (중략) #독립운동 #인삼 #방사겸 #남미 #타이완 ▣ YTN korean 유튜브 채널구독: ▶ 모바일 다시보기 : ▶ Facebook : ▶ Naver TV : [전세계 750만 코리안 네트워크 / YTN kor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