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발췌,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대통령과 역린

[책 발췌,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대통령과 역린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현실에서 뜻을 펴려면 군왕을 설득하여 신임을 받아야 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당시 지식인들이 군왕을 설득하는 것을 사마천은 유세(遊說)라고 했다 한비는 「세난(說難)」 편에서 성공하는 유세의 요령을 정리하면서 용의 거꾸로 난 비늘, 즉 역린을 거론했다 군왕의 말이 곧 법인 시대였으니, 그 심기를 결정적으로 거스르는 말을 했다가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대통령을 용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의 지배를 받는다 대통령은 법률을 만들지 못한다 법률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낼 수 있을 따름이다 법률은 국회가 만든다 죄 없는 사람을 가두지도 못하고 죄지은 사람을 풀어주지도 못한다 유죄가 확정된 사람을 가끔 사면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이젠 그것마저도 적절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면 국민의 비판을 받는다 이제 대통령은 용이 아니라 용을 타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용인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역린도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면 대통령이 재임 중에 쫓겨나기도 하고, 부하의 총에 맞아 죽기도 하며, 퇴임한 뒤에 감옥에 갈 수도 있고, 임기를 마치기는 했으나 그 대통령이 속한 정파가 권력을 잃기도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이미 그 모든 경우를 다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권력의 단맛에 도취하거나 국민이 아니라 자기가 용이라고 믿는 교만함에 빠질 경우, 역린을 건드리면서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수가 있다 모든 권력자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