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강독】 015/499_학이편 15장, "가난해도 비굴하지 말자" #논어 #동양고전 #동양사상 #임동석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아니하며, 부유해도 교만하지 아니하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그 정도라면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시(詩)에 끊듯이 자르듯이, 쪼듯이 갈듯이라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사(賜)야, 비로소 가히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일러주면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아는구나 ” 【諂】남에게 卑屈하게 구는 것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子貢問曰: 「富而無驕, 貧而無諂, 何如?」 孔子曰: 「可也; 不如貧而樂道, 富而好禮 」”라 함 【詩】≪詩經≫(衛風 淇奧篇)의 “瞻彼淇澳, 緣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咺兮 有匪君子, 終不可諼兮”의 일부 “玉器를 만들 때의 여러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學問을 열심히 하는’ 뜻으로 비유함 【賜】子貢의 이름 ‘貢’과 ‘賜’는 相補的인 뜻을 가지고 있음 古代 名과 字는 흔히 상보적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음 【告諸往】저(諸)는 ‘之於’ 혹은 ‘之乎’의 합음자로 ‘저’로 읽음 ◈集註 015-① ○樂, 音洛 好, 去聲 ○諂, 卑屈也 驕, 矜肆也 常人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 而忘其貧; 好禮則安處善, 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樂의 音은 洛(락)이며, 好는 去聲이다 ○‘諂’은 비굴함을, ‘驕’는 자랑하며 제멋대로 함을 뜻한다 보통 사람으로서 貧富 중 어느 경우에 빠지면 스스로 지켜낼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두 경우의 병폐가 있다 아첨도 없고 교만도 없다면, 스스로 지킴을 아는 것이기는 하나, 능히 빈부의 밖으로 초탈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무릇 可라고 일컬은 것은 겨우 가하다는 뜻으로 아직 未盡한 바가 있다는 표현이다 즐겁게 여기면 心廣體胖(마음이 넓어지고 몸은 살찜 평안해짐을 뜻함)하여 그 가난을 잊게 된다 禮를 좋아하면 善에 처함을 편안히 여겨, 이치대로 따름에 즐거움을 느끼느라 역시 스스로 부유함을 알지 못하게 된다 子貢은 貨殖(재물을 늘림, 先進篇271)에 뛰어나 먼저 가난하였으나 뒤에 부유하게 되긴 하였지만, 일찍이 힘써 스스로 지켜낸 자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 문제를 여쭈운 것이며, 夫子의 답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아마 이미 능한 바를 인정해 주면서 아직 이르지 못한 바를 힘쓰도록 한 것이리라 015-② ○磋, 七多反 與, 平聲 ○詩衛風淇奧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 而益求其精也 子貢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引是 詩 而明之 ○磋는 反切로 ‘七多反’(차)이며, 與는 平聲(의문종결사)이다 ○詩는 衛風 기욱(淇奧)篇의 구절로 骨角을 깎아 다루는 자가 이미 자르고 난 후에도 다시 갈며, 玉石을 다듬는 자가 이미 쫀 다음에도, 다시 이를 문질러 갈 듯이 그 다듬음이 이미 정밀하다 하여도 더욱 더 정밀함을 요구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子貢은 스스로 無諂無驕한 정도가 지극한 것으로 여겼지만, 夫子의 말을 듣고 다시 義理의 무궁함을 알게 되어, 비록 얻은 것이 있다 하여도 얼른 자족할 수가 없어서, 그 까닭으로 詩를 인용하여 이를 밝힌 것이다 015-③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辨說而明矣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 而不察切己之實病也 ○‘往’이란 이미 말한 바를 뜻하며, ‘來’란 아직 말하지 아니한 것(다음에 할 말)을 뜻한다 ○내(朱熹) 생각으로는 “이 章의 문답은 그 얕고 깊고, 높고 낮음이 진실로 辨說을 기다릴 것도 없을 정도로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끊지 않으면 갈 일이 없고, 쪼지 않으면 문질러 갈 일이 없다 따라서 배우는 자는 비록 조그만 성취에 안주하느라 造道(道에 나아감 造는 之와 같음)의 극치를 구하지 않아서도 안 되지만, 역시 虛遠에 매달려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실제의 병폐를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도 안 될 것”이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