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MBC뉴스]R아침용]유교현판이야기 29편- 안동 서미리 서간사
2018/05/20 16:52:16 작성자 : 이호영 □ 서간사(西磵祠) 123] 유교현판 이야기: -오늘은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나라의 주권을 온몸으로 지키고자 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절개와 지조를 존모하여 건립한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에 있는 ‘서간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25] 서간사는 1669년 지역 사림에 의해 ‘서간정사’를 지어 청음 김상헌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1786년에 ‘서간사’로 사액되었지만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어 현재는 강당인 ‘강린당’만 남아 있습니다 129] -청음 김상헌 선생은 서인의 영수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 판서로 있던 그는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는 병자호란의 굴욕을 분개하며 고향인 안동 풍산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淸遠樓)에서 생활하다가 이곳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초가집을 지어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 짓고 은거하였습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 안동 서미리에서 중국 심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131] -서간사 편액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강당인 ‘강린당’ 뿐입니다 ‘강린’은 인경(麟經),즉 춘추를 강론한다는 뜻입니다 춘추는 공자가 기록한 역사서로서, 한마디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를 말하는데 '춘추대의’는 바로 청음 선생의 절의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133] 저 위에 보이는 목석거유허비(木石居遺墟碑)는 청음 김상헌 선생이 이곳 서미리로 거처를 옮긴 후 청백과 절의의 정신을 담아 거처에 ‘목석거(木石居)’라는 당호를 써서 걸었습니다 그 뒤 목석거는 남아있지 않고 그의 7대손인 안동부사 김학순이 '목석거유허비'를 만들어 비각 속에 간직하여 놓았습니다 141] -은자암(隱者巖) 서간사 강린당 가는 길목에 '은자암'이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전면에'海東首陽 山南栗里'라는 암각이 있습니다 이는 청음이 기거한 서미리가 도의와 절의를 지킨 중국의 만고충신 백이숙제가 은거한 수양산과 자연으로 귀의한 도연명의 집이 있던 율리와 같은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60] 17세기 당시 국제정세가 어지러웠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나라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청음 김상헌 선생의 대인다운 풍모가 작금의 정치현실을 떠올려 볼 때 더욱 우러러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유교현판 이야기, 한국국학진흥원의 권진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