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궁중비사] 궁녀를 첩으로 두었다 큰 일이 난 남자들

[조선궁중비사] 궁녀를 첩으로 두었다 큰 일이 난 남자들

#조선궁중비사 #궁녀 #첩 #출궁 #이영림 #유집 #한순 #세종 #연산군 #성종 #홍백경 #이축 #종친 #경국대전 출궁을 했다고 궁녀들이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궁녀는 입궁할 때 이미 왕의 여자가 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다시 혼인할 수 없었습니다 궁녀를 해방시키는 취지가 혼인하지 못한 그들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데에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실현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종 3년인 1662년 4월 2일엔 승지 김시진이 이를 지적하며 궁녀들도 혼인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현종은 화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시진의 말이 옳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으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도에 어긋나지만 출궁한 궁녀들은 양반들의 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궁궐에서 방출된 궁녀를 취하거나 첩으로 들였다가 발각되면 유배형 이상의 형벌에 처해졌고 궁녀도 같은 벌을 받고 천민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렇지만 출궁한 궁녀들을 첩으로 삼는 일은 조선시대에 심심찮게 일어났는데 세종 21년인 1439년 5월 15일, 사헌부에서 별시위 이영림이 궁에서 나간 시녀와 간통했으니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5월 15일 임술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궁녀와 간통한 별시위 이영림에게 두 등을 감하도록 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별시위(別侍衛) 이영림(李英林)이 궁(宮)에서 나간 시녀(侍女)를 간통(奸通)하였으니, 율에 의하여 처참(處斬)하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두 등(等)을 감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참형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형을 낮춰 유배를 보냈는데 간통 사건에 연루된 궁녀의 구체적인 신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분명 가뭄 때문에 세종 대에 방출된 어린 궁녀였을 것입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출궁 궁녀의 간통 사건은 매우 강력하게 처벌했지만, 연산군 대에 접어들면서 처벌 수위가 크게 낮아졌는데 연산군 6년인 1500년 2월 16일에 영광군수 유집이 출궁 궁녀와 간통한 한순을 고발했습니다